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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독도를 지킨 조선의 백성 < 안용복 >

by 무님 2020.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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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은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 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으로 복무하면서 왜관에 자주 출입하여 일본 말을 잘하였다. 동래에 주둔 중인 조선 수군(경상좌수영) 부대로 들어가 능로군(能櫓軍) 병사로 근무하여 당시 부산에 주재 중인 왜관(倭館)을 자주 왕래하고 일본인과 대화를 했던 영향 때문에 일본어에도 능통한 편으로 일본어 통역도 맡은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 당시에는 평범한 어획 활동을 하고 있었으나,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울릉도에 몰래 불법으로 입항한 일본 어선이 정박한 것을 본 후에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 하던 중 이곳을 침입한 일본 어민을 힐책하다가 일본으로 잡혀갔다.

 

 

 

안용복의 제1차 도일은 1693년 3월에 일어났다. 그때 안용복은 울산 출신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호키() 주 요나코무라()에서 온 일본 어부들과 마주쳤고, 조업권을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인원 부족으로 안용복은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박어둔은 안용복보다 8세 아래로, 역시 정확한 신상은 알 수 없지만 비슷한 처지의 인물로 추정된다. 이것은 그의 삶에서 예기치 않은 수난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바꾼 변곡점이 되었다. 안용복은 인질이 되었지만 대담하고 논리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조선 사람이 갔는데 억류하는 까닭이 무엇이냐며 호키 주 태수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안용복의 거세고 논리적인 반발에 밀린 태수는 그의 주장을 문서로 작성해 막부에 판단과 신병 처리를 물었다.

막부의 회신은 5월에 도착했다. 막부는 안용복 등을 나가사키()로 이송해 돌려보내라고 지시하면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라는 내용의 서계()를 써주게 했다. 이것은 17세기 무렵 일본이 울릉도(와 그 부속 도서인 독도)가 자신의 영토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중대한 결정을 일개 어부인 안용복이 이끌어낸 것이었다.

9월 초 안용복은 대마도에 인계되었고 50일 정도 억류된 뒤 사신 타다 요자에몽(. 조선 기록에는 귤진중()으로 표기)을 따라 부산 왜관으로 송환되었다. 9개월 만의 귀국이었다. 그러나 그는 왜관에서도 40일 넘게 갇혀 있다가 12월에야 동래부사에게 인도되었다. 적지 않은 고초를 겪으면서 중요한 영토문제를 논의하고 돌아온 그에게 내려진 것은 포상이 아니라 처벌이었다. 그와 박어둔은 허가 없이 월경(- 국경을 넘는 일)한 죄목으로 각각 곤장 100대와 80대를 맞았다. 그러나 이때 울릉도ㆍ독도 문제는 획기적인 전환을 맞았다. 1694년(숙종 20) 4월 갑술환국으로 남구만()ㆍ윤지완() 등 소론 정권이 들어선 뒤 조선의 대일노선은 강경책으로 바뀌었다. 조선 조정은 “일본인들의 울릉도 도해() 및 채어()를 금지한다”고 결정했고(1694년 8월), 삼척첨사 장한상()을 보내 울릉도를 수색케 했다(같은 해 9월 10일~10월 6일). 장한상은 돌아와 [울릉도사적()]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독도는 울릉도 동남쪽 아득한 바다에 있는데,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며 거리는 300리 밖에 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 뒤 1년 넘게 조선 조정은 일본 막부를 대행한 대마도와 울릉도ㆍ독도의 영유권과 어업권을 둘러싸고 복잡한 논의를 벌였다. 그 결과 1696년(숙종 22) 1월 일본 막부는 울릉도ㆍ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일본 어민의 도해와 어업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17세기 후반,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고유 영토임을 확인한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이런 결정은, 스스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응한 안용복의 행동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제2차 도일은 안용복의 자발적인 결행이었다. 1696년 1월 막부는 울릉도ㆍ독도의 조선 영속과 일본 어민의 도해ㆍ어업을 금지하기로 결정했지만, 대마도가 서계 접수를 미루는 바람에 시행이 계속 늦춰지고 있었다.

그러자 안용복은 자신이 이 문제를 선제적으로 직접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관리로 자칭해 도일하는 대담한 계획을 실행했다. 그의 준비는 치밀했다. 그는 울릉도ㆍ독도가 강원도에 소속된 것으로 그려진 [조선팔도지도()]와 자신이 입을 푸른 철릭(- 무반 당상관의 공복), 검은 갓, 가죽신 등 증빙 자료와 물품을 마련했다.

1696년 3월 안용복은 조선 어민을 대거 이끌고 울릉도로 갔다. 그 뒤 일본에서 안용복은 32척의 배를 동원했다고 진술했는데, 1척에 5명씩만 잡아도 160명이나 되는 규모다.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일본 어민들은 예전처럼 조업하고 있었다. 양국의 협약이 지켜지지 않으리라는 안용복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다. 안용복은 그들의 월경죄를 꾸짖고 다시 호키 주로 갔다. 그는 대담하게 행동했다. 그는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준비한 관복을 입어 정식 관원처럼 차린 뒤 호키 주의 수석 가로() 아라오 오오카즈()와 담판했다. 안용복은 대마도주의 죄상을 고발하는 문서를 작성해 제출했고, 호키 주에서는 그것을 막부에 전달했다.

이때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던 안용복의 계획은 그러나 난관에 부딪쳤다. 그동안 조선과의 대일 통교를 담당해온 대마도가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막부의 연락으로 안용복의 입국과 직소(- 규정된 절차를 밟지 않고 상급 관청에 직접 호소함) 사실을 알게 된 대마도는, 안용복이 조선의 관원이 아니더라도, 그동안의 관례와는 달리 자신을 거치지 않고 막부와 직접 접촉하도록 허락한(좀 더 정확히는 그렇게 했다고 판단한) 조선 조정의 의도를 의심했다. 대마도에서는 안용복의 고소장을 물리치도록 막부에 요청하고 그 일행을 표착민()으로 처리해 자신들을 거쳐 송환하도록 요청했다. 그 결과 안용복 일행은 목표했던 울릉도ㆍ독도의 조선 영속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696년 8월에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1696년 8월 하순 강원도 양양에 도착했지만 현감에게 구금되었다가 며칠 뒤 탈출해 그동안 주로 거주한 동래부로 갔다. 그러나 9월 12일에 체포되어 한양으로 이송되었고 비변사에 구금되어 국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대신들의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유상운(. 영의정)ㆍ윤지선(. 좌의정)ㆍ서문중(. 우의정)ㆍ유집일()ㆍ민진장(. 병조판서)ㆍ최석정(. 이조판서)ㆍ김진구()ㆍ오도일() 등 노론 대신들은 처형을 주장했다. 안용복의 도일은 건국 이래의 공도정책을 어긴 범경() 행위이며, 대마도가 아닌 호키 주를 거쳐 막부와 접촉하고 정부문서를 위조한 것은 외교적 범죄라는 논거였다.

남구만(영중추부사)ㆍ윤지완(영돈녕부사)ㆍ신여철(. 지중추부사) 등 소론 대신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범죄행위는 인정하지만 호키 주 태수를 직접 만나 울릉도ㆍ독도의 영유권과 어업권을 막부에 주장한 것은 국가에서도 제기하기 힘든 문제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그런 공로를 인정해 감형을 주장했다. 직책과 당파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형이 우세한 견해였지만, 격론 끝에 안용복은 결국 유배형으로 감형되었다(1697년(숙종 23) 3월). 1658년에 태어난 것으로 계산하면 40세 때의 일이었다. 유배형에 처해진 뒤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 안용복 사건의 기록 < 조선왕조실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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