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장씨는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이며 20대 왕 경종의 생모이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이름은 옥정(玉貞)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역관(譯官) 출신인 장형(張炯)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부인 장응인(張應仁)과 외조부인 윤성립(尹誠立)은 모두 역관으로 벼슬이 정3품과 종4품에 이르렀으며, 당숙인 장현(張炫)은 숙종 때에 역관의 수장인 수역(首譯)을 지냈으며 거부(巨富)로 이름이 높았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內人)으로 뽑혀 입궁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숙종의 후궁이었으며, 한 때는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조선 역사상 궁녀 출신으로 정실 왕비까지 올라간 유일한 여성이다. 또한 나이상으로 따지자면 숙종 임금을 거쳐간 모든 여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숙종보다 나이가 많다. 공식적인 역사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녀의 미모가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1680년(숙종 6) 무렵부터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당숙인 장현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한 뒤에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의 심복으로 여겨져 유배되었다.
희빈 장씨는 1683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야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며,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소의(昭儀)로 승격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昀, 뒷날의 경종)을 낳았고, 이듬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禧嬪)이 되었다. 당시 송시열(宋時烈) 등의 서인(西人)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다가 정권을 남인(南人)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이 몰락하면서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민씨가 폐비되고, 희빈 장씨가 1689년(숙종 15) 음력 10월 2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고, 희빈 장씨는 그해 음력 4월 12일에 왕후(王后)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다. 그리고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발고로 거처인 취선당(就善堂)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賜死)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그녀를 추존했기에 그녀의 정식 칭호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이다. 그녀를 기리는 사당도 대빈궁(大嬪宮)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묘소(대빈묘)는 왕을 낳은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원'(園)이 아니라 '묘'(墓)다. 또한 현재, 대빈묘(大嬪墓)는 왕을 낳은 후궁치고는 너무나 매우 초라하다. 이는 경종이 즉위기간이 짧아 추숭할 여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는데, 영조의 경우에는 오래 즉위해서 자신의 생모를 추숭했다.
희빈 장씨는 죽은 뒤에 광주(廣州) 진해촌(眞海村,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매장되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옮겨졌다.
*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던 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35권, 숙종 27년 10월
- 밤에 혜성이 익수의 도수 안에 나타나다
- 인정문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다. 영의정 최석정을 진천현에 부처시키다
- 허지를 승지로 삼다
- 세자의 처지를 헤아리자는 공조 판서 엄집의 상소문
- 유성이 실성 윗쪽에서 나와 북방으로 들어가다
- 자연 재해와 천문 변화 등 나라의 재앙에 대해 비망기를 내리다
- 최석정을 중도 부처하라는 명령을 거두자는 정언 유명응의 청을 따르지 않다
- 최석정을 용서하라는 부교리 권상유·부수찬 이관명의 상소문
- 왕명을 받들어 좌의정 이세백 등이 정국을 내병조에 설치하고, 숙정 등을 국문하다
- 최석정의 중도 부처를 둘러싸고 지평 박휘등 장령·윤홍리 등이 서로 인피하다
- 세자의 어머니인 장 희빈에게 인정과 법률을 참작하자는 판부사 유상운의 상소문
- 세자를 극진히 보호하는 방도에 대한 보덕 유명웅·사서 이태좌 등의 상소문
- 최석정을 용서하자는 승지 심평의 상소문
- 궁녀 숙정·숙영·축생 등을 모두 결안 취초하고 군기시 앞길에서 참형시키다
- 모역한 죄를 실토한 숙정의 결안 내용
- 모역한 죄를 실토한 축생의 결안 내용
- 모역한 죄를 실토한 오례의 결안 내용
- 모역한 죄를 실토한 자근례의 결안 내용
- 모역한 죄를 실토한 철생의 결안 내용
- 세자를 보전하는 방안으로 장 희빈을 용서하자는 판부사 서문중의 상소문
- 장희재를 직접 범한 죄로 토죄해야 한다는 대사간 윤덕준의 상소문
- 세자를 극진히 보전하는 방도에 대한 우의정 신완의 상소문
- 나인 정영을 먼 변방으로 정배하라고 하교하다
- 수문중을 호위 대장으로 삼다
- 번개가 번쩍이고 혜성이 익수의 도내에 나타나다
- 이상영을 도승지로, 이야를 승지로 삼다
- 밤에 혜성이 익수의 도내에 나타나다
- 중도 부처 당한 최석정을 용서해 달라는 사서 이태좌의 상소문
- 세자를 위로하고 보호하는 방도를 다하라는 우부승지 허지의 상소문
- 세자를 위하여 국청을 다스림에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행 사직 강현의 상소문
- 빈어가 후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하라고 하교하다
- 국청 죄인 숙정·숙영 등이 흉물을 궁전에 파묻은 사실에 대해 하교하다
- 밤에 혜성이 익수의 도내에 나타나다
- 심평·서종헌·이민영·유명웅·민진후 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
- 사서 이태좌의 상소로 인해 장령 윤홍리가 면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다
- 최석정을 두둔하고 윤홍리를 배척하는 정언 유명응이 면직을 청하니 허락하다
- 정언 황일하가 윤홍리를 논핵함이 부당하다면서 면직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다
- 공의와 은의, 천리와 인정의 기미를 자세히 살피라는 지평 이동언의 상소문
- 침전을 이어하라는 우의정 신완의 상소에 인산 후에 이어하겠다고 유시하다
- 희빈 장씨를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 한 죄로 자진하게 하라고 하교하다
- 승정원과 옥당에서 청대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 부교리 권상유 등이 세자 보안을 위해 장 희빈의 구명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다
- 판중추부사 서문중 등이 청대하여 장 희빈의 구명을 논의했으나 허락하지 않다
- 행 사직 이인엽이 은혜를 온전히 하라는 뜻으로 상소를 올리다
- 혜성이 장수의 안에 나타나다
- 지평 이동언의 청에 의거, 전 사서 이태좌를 유배시키다
- 형조 판서 조상우·참판 이국화가 은혜를 온전히 하라는 뜻으로 상소를 올리다
- 혜성이 장수 안에 나타나다.
- 예조로 하여금 자진한 장 희빈의 상장의 제수를 참작하여 거행하라고 하교하다
- 왕세자와 빈궁의 거애 절차에 대해 논의하다
- 장씨의 상장에 제수를 주라고 호조에게 하교하다
- 장씨의 상을 선인문으로 나가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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