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는 조선 제19대 숙종의 계비. 기사환국 때 폐서인이 되었다가 갑술옥사로 다시 왕후로 복위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인현왕후전》이 전해진다. 성은 민씨(閔氏)이고,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존호(尊號)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徽號)는 의열정목(懿烈貞穆)이다. 형조판서 등을 지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의 딸로서 1681년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숙종은 세자로 책봉되고 김만기(金萬基)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숙종이 왕으로 등극하자 김씨는 인경왕후(仁敬王后)가 되었다. 하지만 인경왕후가 천연두로 20세에 사망하자 인현왕후가 숙종 비로 간택되었던 것이며 그녀의 나이 15세였다.
인현왕후는 1680년,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가 천연두를 앓으면서 20살에 요절하였다. 그 다음해인 1681년, 명성왕후의 주도 아래에 인현왕후가 간택되어 왕비로 책봉된다. 인현왕후 민씨의 집안은 서인으로 당시 조정의 실권은 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숙종은 궁녀 장옥정(張氏;희빈 장씨)을 좋아하여 인현왕후 민씨를 멀리하였다. 당시 장옥정은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 궐밖에서 살고 있었지만 숙종은 항상 장옥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장옥정은 서인(西人)과 정치적으로 대립세력이었던 남인(南人)에 속했기 때문에 견제를 받아 후궁으로 머물수가 없었다. 하지만 1683년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뜨자 숙종은 1686년 3년 상을 마치고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 후궁으로 삼았다.
인현왕후가 희빈 장씨를 질투한 기록은 여럿 남아 있다. 숙종의 총애를 받는 희빈 장씨를 견제하기 위해 영빈 김씨를 들이도록 하기도 했고, 희빈 장씨의 버릇을 고친다며 아랫사람을 시켜 장옥정에게 종아리를 친 적도 있었다. 정사 기록에서 왕후가 후궁에게 직접 매질하라고 명한 최초의 사례이며, 그만큼 장옥정에 대한 시기가 대단하다는 반증이다. 그 기가 센 원경왕후 민씨나 문정왕후 윤씨조차, 후궁에게 매질하여 훈계한 사례는 정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랫사람이 후궁에게 매질을 가하게 명한 것은, 당시 후궁이였던 희빈 장씨에게 상당한 모욕감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이 때 희빈 장씨는 다리에 부종이 생겨 부은 상태였다고 한다.
다만, 이 매질 사건이 벌어진 데에는 당시 종4품 숙원이었던 희빈 장씨의 부적절한 처신이 있었다. 숙종이 신하들이 있는 자리에서 대뜸 인현왕후를 두고 이런 이야기를 하자, 신하들이 당황해서 인현왕후를 옹호한다. "부인이 질투하는 일은 여염집에서도 흔히 있는 일인데, 중전께서도 여염집에서 자랐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지난 9년을 국모로 있었으니 그런 부분은 적당히 넘어가시라"며 인현왕후를 옹호했다. 서인만 옹호하고 남인은 숙종을 부추겼을 것이라고 오해하지만, 이 때 서인이든 남인이든 한 마음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아무리 인현왕후가 서인의 입장으로 나온 왕비고 희빈 장씨 덕분에 남인들이 집권했다고 해도, 엄연히 국모인 왕비를 폐출하라는 말을 따르는 것은 신하의 도리에 어긋나며 명분도 없는 일이었다. 되려 숙종이 신하들의 그런 충고를 듣지 않았다.
신하들의 말대로, 이 정도는 남녀차별이 심했던 조선 시대 기준으로도 넘어가 줄 수 있는 정도의 투기였다. 내명부를 관장하는 왕비의 입장으로서도, 희빈 장씨에게만 지나친 애정이 쏠리는 것이 그리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중전이 후궁보다 엄연히 더 높은 사람이니, 아랫사람인 희빈 장씨의 방자한 행동을 훈계할 의무 겸 권리 또한 있는 법이다. 위의 사례처럼 희빈이 내전에 들어와 중전의 처지를 비꼬는데, 윗사람이 되어 그걸 질책하지 않는 것 또한 조선시대의 예법상 옳지 못한 일이다. 숙종은 이를 빌미로 1689년에 기사환국을 일으켰고 조정은 남인들이 차지한다.
폐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탄일문안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인현왕후 역시 폐비가 되어 안국동에 있는 사가로 내쳐진다. 노론, 소론은 물론, 남인들조차 반대했는데도 결정한 일이다.
인현왕후에게 물어진 죄는, '자식이 없는 죄', ‘죽은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여 왕에게 거짓을 고한 죄’, ‘왕의 육체를 조롱한 죄’, ‘투기로 내전의 일을 조정으로 확대시켜 국정을 어지럽힌 죄’, ‘내전에서 궁인의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킨 죄’가 있다. 칠거지악 중 3가지나 범했으나 사실 인현왕후가 저지른 죄 정도는 넘어갈 수 있는 죄였다. 특히 '자식이 없는 죄'는 매우 문제였던게 당시 불과 1년전에 세상을 떠난 대왕대비 장렬왕후를 (숙종의 의도와 관계없이) 간접적으로 고인모독하는거나 다름없었고, 먼 조상만 따져도 선조의 첫 왕비 의인왕후도 자식이 없었다. 다르게 얘기하면 폐위의 명분과 정당성이 워낙 없었기에 들먹이지 않는게 나은 죄까지 막무가내로 들먹였던 것이다.
1693년 궁녀 출신의 최씨가 숙종의 아이를 잉태하자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도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국정을 운영하는 남인에 대한 실망감도 커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1694년 남인이 주도하는 역모사건이 고변되었고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서인 소론 세력이 다시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으며 그해 4월 마침내 폐서인되었던 민씨도 왕후로 복위하였다. 복위된 이후로도 끝까지 아이는 낳지 못했으며, 장희빈의 아들인 왕세자 윤이 인현왕후 아래로 입적된다. 인현왕후전에 따르면 인현왕후는 원수의 자식인 왕세자 윤을 친아들 못지 않게 귀여워했으며, 세자도 적모(嫡母)인 인현왕후를 매우 따랐다고 한다. 인현왕후의 오라비인 민진원의 단암만록에서도 인현왕후가 "세자의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조석으로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며, 사모하고 공경함이 사친(장희빈)한테 하는 것보다 낫다"고 표현했다 점을 봐서는 서로의 관계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인현왕후는 복위된 이후로도 깊은 병으로 인해 세자나 왕자들을 돌볼 상태가 아니였다. 1701년 7월부터 기력이 쇠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며, 숨 쉬는 게 힘들어지고, 밤중에 손발이 차디차게 식는 등의 말기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소변이 막히고 구강에 부스럼이 생기는 등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갔다.
1701년 8월 13일에는 친정 오빠들인 민진후와 민진원을 숙종이 궁궐로 불러들인다. 이날 밤에는 아예 의식을 잃고 부정맥과 유사한 증상을 보이더니, 결국 복위 8년 후인 1701년 8월 14일 새벽 2시경, 창경궁 경춘전에서 깊은 통증에 시달리다 별세하였다.
인현왕후를 주인공으로 하여 궁녀가 쓴 소설 《인현왕후전(仁顯王后傳)》이 전하는데, 인현왕후를 유교적 덕목과 인품을 갖춘 여인으로 그려내고 있다. 반면 숙종실록에는 희빈장씨가 왕자 윤을 출산하자 이로 인한 시기와 질투로 숙종과 관계가 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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