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숙종이 사랑한 여인 < 희빈 장씨 >

by 무님 2020. 7. 3.
728x90

희빈 장씨는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이며 20대 왕 경종의 생모이다. 본관은 인동()이며, 이름은 옥정()으로 전해진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다. 친가와 외가 모두 역관 집안으로 매우 부유한 환경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부인 장응인()과 외조부인 윤성립()은 모두 역관으로 벼슬이 정3품과 종4품에 이르렀으며, 당숙인 장현()은 숙종 때에 역관의 수장인 수역()을 지냈으며 거부()로 이름이 높았다. 정확한 시기와 배경은 확인되지 않으나 어린 나이에 나인()으로 뽑혀 입궁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희빈 장씨가 “머리를 따 올릴 때부터” 궁중에 들어와 생활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숙종 후궁이었으며, 한 때는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조선 역사상 궁녀 출신으로 정실 왕비까지 올라간 유일한 여성이다. 또한 나이상으로 따지자면 숙종 임금을 거쳐간 모든 여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숙종보다 나이가 많다. 공식적인 역사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녀의 미모가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1680년(숙종 6) 무렵부터 숙종(, 재위 1674∼1720)의 총애를 받았으나 숙종의 생모인 명성왕후()의 명으로 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당숙인 장현도 경신환국()으로 서인(西)이 집권한 뒤에 복창군() 이정()의 심복으로 여겨져 유배되었다.
희빈 장씨는 1683년 명성왕후가 죽은 뒤에야 다시 궁으로 돌아왔으며, 1686년(숙종 12) 숙원()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소의()로 승격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 뒷날의 경종)을 낳았고, 이듬해 음력 1월 아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희빈()이 되었다. 당시 송시열() 등의 서인(西)은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대하다가 정권을 남인()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몰락하면서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1667∼1701) 민씨가 폐비되고, 희빈 장씨가 1689년(숙종 15) 음력 10월 22일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었고, 희빈 장씨는 그해 음력 4월 12일에 왕후()의 자리에서 쫓겨나 다시 희빈의 작호를 받았다. 그리고 1701년(숙종 27) 인현왕후가 죽은 뒤에 영조(, 재위 1724∼1776)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발고로 거처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려 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그녀를 추존했기에 그녀의 정식 칭호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이다. 그녀를 기리는 사당도 대빈궁(大嬪宮)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묘소(대빈묘)는 왕을 낳은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원'(園)이 아니라 '묘'(墓)다. 또한 현재, 대빈묘(大嬪墓)는 왕을 낳은 후궁치고는 너무나 매우 초라하다. 이는 경종이 즉위기간이 짧아 추숭할 여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는데, 영조의 경우에는 오래 즉위해서 자신의 생모를 추숭했다.

 

희빈 장씨는 죽은 뒤에 광주() 진해촌(,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매장되었으나, 1969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 경내의 대빈묘()로 옮겨졌다.

 

 

*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던 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35권, 숙종 27년 10월

 

728x90

'조선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숙종 6년 경신환국  (0) 2020.07.07
독도를 지킨 조선의 백성 < 안용복 >  (0) 2020.07.06
숙종의 계비 < 인현왕후 민씨 >  (0) 2020.07.02
조선 19대 왕 숙종 - 이 순  (0) 2020.07.01
숙종실록  (0) 2020.06.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