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은 이름 이윤(李昀), 자 휘서(輝瑞). 숙종의 아들. 어머니는 희빈 장씨(禧嬪張氏,장희빈)이다. 경종의 비(妃)는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 단의왕후(端懿王后), 계비는 어유구(魚有龜)의 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단의왕후는 경종이 세자로 있을 때 사망하여 동구릉 혜릉에 안장되었고 계비 선의왕후 또한 소생이 없이 1730년(영조 6년)에 사망하였다. 숙종의 (소생은 후궁 소생이지만)첫 아들이었던 까닭에, 태어난지 100일도 안되어 원자 책봉을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희빈 장씨의 소생이었고, 연잉군과 연령군 같은 다른 왕자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왕자가 숙빈 최씨 소생의 요절한 아들 밖에 없었기에 그는 숙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장희빈과 이를 배경으로 하는 남인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유년기에는 비교적 평탄한 세자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숙종은 알다시피 무수한 환국(일당전제화를 방지하고 왕권 강화에 목적이 있음)을 일으키며 신하들을 찍어눌렀고, 어머니가 후궁으로 낮추어지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그도 인현왕후의 법적 아들이 된다. 어찌보면 어머니의 원수지만, 그래도 인현왕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14세가 되던 해에는 결국 생모 희빈 장씨가 중전 인현왕후를 모함하고 저주했다는 사실이 숙종에게 밝혀져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는 사태가 터졌다.
1690년(숙종 16) 폐비 장희빈의 소생이라는 이유와 정치적으로는 남인계에 속한다는 점 때문에 송시열(宋時烈) 등 당시 정치적 실세였던 서인 세력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숙종에 의해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때문에 경종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였던 송시열은 사사되었고 서인은 한때 실각하였다. 어머니 희빈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어린시절에는 총명함이 뛰어난 세자로 칭송을 받았고 숙종의 극진한 배려속에서 성장하였다. 하지만 숙빈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이복동생인 연잉군(延?君: 뒤의 영조)이 출생하였고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경종 또한 숙종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파되면서 숙빈 최씨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세자(경종)는 소론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희빈 장씨가 폐출되어 사사되면서 경종은 점차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모했고 숙종으로 부터도 견제와 미움을 받아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1717년 숙종의 주도하에 대리청정(代理聽政)하였으나, 그해 숙종이 몰래 노론의 이이명(李?命)을 불러 세자가 무자다병(無子多病)함을 이유로 세자를 교체하여 연잉군으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이때문에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대립은 극에 달하였다. 숙종은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하고 싶었지만 정치적 부담으로 불가능하자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의 실정을 트집잡아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할 속심이었다. 하지만 대리청정을 맡은 경종은 매우 신중한 처세로 숙종과 노론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으며 숙종 사망까지 버텼으며 결국 조선 20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하지만 왕권은 미약했고 노론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었다. 등극 얼마지나지 않아 후사가 없다는 이유로 1721년 이복동생인 연잉군(후일 영조로 등극)을 세제(世弟)로 책봉한 뒤 다시 노론이 그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의 대리청정을 건의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때 소론의 극려한 반대에 부딪혀 대리청정을 수차례 번복하였다가 노론의 대리청정 건의를 물리치고 친정(親政)을 하였다.
그 뒤 대리청정의 부당함을 극간(極諫)하는 소론 이광좌(李光佐)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김일경(金一鏡)의 탄핵으로 세제 대리청정의 발설자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좌의정 이건명(李健命)·중추부판사 조태채(趙泰采)·중추부영사 이이명(李?命) 등의 노론 4대신을 유배보냈다. 또한 1722년 노론이 주도하여 경종을 폐출시켜려는 역모사건이 소론 목호룡(睦虎龍)의 고변(告變)으로 밝혀지자, 유배 중인 노론 4대신을 사사(賜死)한 뒤 노론의 핵심적인 인물들을 숙청하였다. 이것이 신임사화(辛壬士禍)이다. 이후 소론의 과격파인 김일경 중심의 정권은 노론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벌여서 그의 재위 4년 동안은 당쟁(黨爭)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이런 정국의 혼란과 비정한 살육의 정치는 경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더구나 어머니의 죽음 등으로 경종은 화병(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1724년 즉위 4년이 되던 해 그의 건강은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하였고 자리에 누운지 단 며칠 만에 급서하고 말았다. 그의 사망을 두고 세간에는 게장을 먹고 독살되었다는 등 무수한 추측이 난무하였는데 영조에 이르러 경종의 사망에 대한 해명을 하기도 하였다. 능은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懿陵)이다.
* 경종이 승하던 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경종실록15권, 경종 4년 8월
- 금부 도사 김수문을 삭거 사판하게 하다
- 우림 장 채덕윤을 삭거 사판하게 하다
- 이광보·심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임금의 병이 위급해지다
- 군정과 병영의 업무를 하지 않은 황해도 병마 절도사 이기복을 개차하다
- 밤에 한열이 갑자기 심해지다
- 창경궁 환취정으로 옮기다
- 교외에 나가 있는 김일경을 재촉하여 올라오게 하다
- 한열증이 그치지 않다
- 권변·이명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위솔 홍유도를 태거하고 사옹원 주부 박필선을 삭거 사판하게 하다
- 금부도사 윤득귀를 도태시키고 호조 정랑 이제상을 삭거 사판하게 하다
- 한성흠·유필원을 전라 우수사·광주 부윤으로 삼다
- 여러 도에 급재를 더 주게 하고 윤순을 사국 당상으로 임명하다
- 장령 윤동수를 조롱한 감사 권익관을 추고하게 하다
- 유명응·김시혁을 승지·수원 부사로 삼다
- 충청 감사 권익관을 추고하라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는 교리 오수원 등의 상소
- 병이 중하여 침선이 날로 감소되고 소변도 적어지다
- 조상경을 정언으로 삼다
- 약방에서 육군자탕을 올리다
- 밤에 가슴과 배가 아파오다
- 약방에서 두시탕 및 곽향정기산을 진어할 것을 청하다
- 복통과 설사가 심해지다
- 설사 증후가 그치지 않다
- 의식을 잃자 인삼차를 올리다
- 환취정에서 승하하다
- 우의정 이광좌를 원상으로 삼아 직숙하게 하다
- 사각에 목욕을 하다
- 예조에서 성복하는 날 사위하는 절목을 올리다
- 미각에 소렴하고 재궁이 작아 부판을 사용하게 하다
- 생기의 기록을 잘못 올린 승지를 추고하게 하다
- 태백성이 나타나다
- 예조에서 백관의 상복 제도를 수정하여 올리다
- 의정부에서 사위의 절목을 올려 권하나 듣지 않다
- 영의정 최규서가 용인에서 달려오다
- 태백성이 나타나다
- 세제가 왕위에 오르라는 의정부의 계달을 따르다
- 천둥하고 우박이 내리다
- 왕대비의 회복을 경사하는 시험을 졸곡 뒤로 물리어 시행하게 하다
- 사직 이인복이 왕대비 복제 의주를 개정할 것을 청하다
- 대렴하여 시신을 재궁에 내리다
- 선정전에서 성복하다
- 왕세제가 인정문에 나아가 즉위하다
경종실록15권, 경종 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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