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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뒤주에서 굶어 죽은 <사도세자>

by 무님 2020.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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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 자는 윤관(), 호는 의재()다. 잘 알 듯이 영조는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재위했다(각 82세, 52년). 영조는 정성()왕후(1692∼1757)ㆍ정순()왕후(1745~1805) 등 왕비 2명과 정빈() 이씨(1694~1721)ㆍ영빈() 이씨(1696~1764)ㆍ귀인 조씨ㆍ후궁 문씨 등 후궁 4명을 두었다. 왕비에게서는 후사를 보지 못했고, 후궁에게서만 2남 12녀를 두었다(그 중 5녀는 일찍 사망했다).

첫 아들인 효장()세자는 즉위하기 전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숙종 45년(1719) 2월 15일) 9세로 요절했다(영조 4년(1728) 11월 16일). 둘째이자 마지막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 7년 뒤에 태어났다(영조 11년(1735) 1월 21일).

 

 

 

42세 고령에 어렵게 얻은 늦둥이 왕자의 탄생을 당연히 매우 기뻐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난 즉시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법적아들)로 공식 입적한 후 원자로 정한 뒤, 이듬해인 1736년에는 이제 막 돌이 지난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세자가 읽을 책을 임금 영조가 직접 꼬박 밤 새 가면서 필사(筆寫)했다니 말이 필요 없다. 성균관의 탕평비도 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서 특별히 제작했다고 한다.

세자 이선은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총명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태어난 지 4달만에 스스로 기었고, 6달만에 영조의 부름에 어느 정도 대답을 할 수 있었으며, 7달만에 동서남북을 분간했고, 2살에 천자문을 배워 60여 자를 써내었다. 3살에 다식을 받자 수(壽) 자, 복(福) 자가 박힌 과자는 먹고 팔괘(八卦)를 박은 것은 먹지 않았다. 이에 궁녀들이 "잡수소서"라고 권하자 "팔괘는 우주의 근본이니 아니 잡숫겠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팔괘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복희를 그린 책을 보고 "높이 들라."라고 하고 절을 올렸다고 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3살 때는 말하자면 김시습 수준의 천재급이였다. 또 같은 해에 천자문을 배우던 중에 사치 치(侈) 자와 가멸부(富) 자에 이르자 치자를 집고 다시 자신이 입은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조가 어릴 때 쓰던 감투 중에 칠보로 장식된 것을 씌우자 "사치!"라고 거부했다. 그리고 돌 때 입은 옷을 입히려 하자 역시 "사치하여 남 부끄러워 싫다."고 거부했다. 이에 세자를 모시던 나인들이 과연 세자가 알고 말하는가 모르고 말하는가 궁금하여 비단 무명을 놓고 "어느 것이 사치고 어느 것이 사치가 아니나이까?"라고 묻자 세자는 비단을 집어들고 "이것은 사치라."라고 하더니 무명을 집고는 "무명은 사치 아니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인들이 "어느 것으로 옷을 지으어 입으시면 좋으리이까?"라고 묻자 무명을 가리키며 "이것을 입어야 좋으리라."라고 답하였다. 이것은 한중록에 나온 이야기지만, 영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세자는 8세 때 홍역을 앓기도 했지만(영조 19년(1743) 1월) 관례()를 치른 뒤(3월) 당시 세마(. 정9품)였던 홍봉한(, 1713~1778)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했다(11월 13일). 그녀가 바로 유명한 혜경궁 홍씨( , 1735∼1815)다. 홍봉한은 본관이 풍산()으로 선조ㆍ광해군 때 대사간ㆍ대사헌ㆍ대사성을 지낸 홍이상(, 1549~1615)의 후손이었다. 고조 홍주원()은 선조의 1녀 정명()공주와 혼인해 영안위()에 책봉되었고, 외조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좌의정을 지낸 월사() 이정구()였다. 조부 홍중기(, 1650~1706)는 사복시 첨정(종4품)을 지냈고, 아버지 홍현보(, 1680~1740)는 예조판서ㆍ좌참찬까지 올랐다. 그의 가계는 당시 노론의 주요 가문인 여흥 민씨ㆍ경주 김씨 등과 긴밀히 혼인하고 있었다.

급제하지 못하고 세마라는 말직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기 전까지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딸의 간택을 계기로 도승지(영조 25년(1749))에 발탁된 뒤 어영대장(영조 26년)ㆍ예조ㆍ이조판서ㆍ좌참찬(영조 29년)을 거쳐 우의정ㆍ영의정(영조 37년(1761))까지 오르면서 영조 중ㆍ후반 노론의 대표적 대신으로 활동했다.

세자는 홍씨와 혼인한 7년 뒤 첫아들인 의소세손()을 낳았지만(영조 26년(1750) 8월 27일)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영조 28년(1752) 3월 4일). 그러나 같은 해 다시 둘째 아들을 낳았다(9월 22일). 그는 24년 뒤 즉위해 조선시대의 대표적 현군으로 평가받는 정조(, 1752∼1800. 재위: 1776∼1800)가 되었다.

 

세자는 영특했지만 기본적으로 무인적 기질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런 측면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 뒤 영의정까지 오른 주요한 대신인 조현명()이었다. 그는 두 살 때 거행된 책봉례를 보고서 “세자가 효종을 닮았으니 종사의 끝없는 복”이라고 경하했다. 널리 알듯이 효종(, 1619~1659. 재위: 1649~1659)은 북벌을 추진하는 등 군사력을 중시한 국왕이었다. 세자는 어릴 때부터 반드시 군사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병서도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공법을 적절히 변화시키는 오묘한 이치를 터득했다고 한다.

신체적 조건과 무예도 뛰어났다. 일찍이 효종은 무예를 좋아해 한가한 날이면 북원(: 대궐 뒤쪽에 위치한 정원)에서 말을 달리면서 무예를 시험했는데, 그때 쓰던 청룡도()와 쇠몽둥이가 세자의 거처인 저승전(殿)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힘 좋은 무사들도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무거웠지만, 세자는 15∼16세 때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기운이 대단했다. 무예도 뛰어나 활을 쏘면 반드시 명중시켰고, 나는 듯이 말을 몰았다. 사람들은 조현명의 예견에 감탄했다. 무예에 대한 세자의 열정은 저술로 이어졌다. 세자는 24세 때인 영조 35년(1759)에 장수와 신하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걱정해 [무기신식()]이라는 책을 엮었다. 그 책은 명()의 유명한 장수인 척계광()의 [기효신서()]와 선조 때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를 바탕으로 곤봉ㆍ장창() 등 6가지 기예에 죽장창()ㆍ월도()ㆍ쌍검() 등 12가지 기예를 추가해 그림과 설명을 붙인 저작이다(이상 어제장헌대왕 지문). 이 책은 훈련도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그 뒤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의 저본(: 원본)이 되기도 했다.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는 늘 군복을 입고 다녔으며, 홍역에 걸렸을 때도 혜경궁 홍씨에게 제갈량의 <출사표>를 늘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기질에 바탕한 세자의 국방ㆍ국제정세 인식은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우리나라는 좁아서 군사를 쓸 땅이 없다. 그러나 동쪽으로는 왜()와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오랑캐와 이웃했으며 서쪽과 남쪽은 큰 바다니, 바로 옛날의 중원()인 셈이다. 지금은 비록 변방에 경보()가 없지만, 위험에 대비하는 태세를 구축해야 한다. … 성인들은 아무 걱정 없는 편안한 시기에도 병기를 만들어 갑작스러운 외적에 대비했는데, 우리나라에는 효종께서 결심하신 일까지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어제장헌대왕 지문)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기질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영조는 세자가 8세 때 형조판서 이종성()을 세자시강원 빈객으로 임명하면서 세자의 강인한 성품을 인자함으로 보필해 조화롭게 해달라고 부탁했다(영조 19년(1743) 9월 18일).

세자가 13세 때 영조는 “중국의 한 문제와 무제 중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세자가 문제라고 대답하자 영조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면서 “나를 속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왕은 “네가 지은 시 중에 ‘호랑이가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는 구절이 있어 기가 매우 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영조 24년(1748) 5월 19일). 1년 뒤에도 영조는 “‘쾌()’라는 한 글자가 네 병통이니 경계하고 경계하라”고 당부했다(영조 25년 2월 17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10세 이후 세자의 성격은 점차 특징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아버지들처럼, 영조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적지 않은 선왕들처럼 영조도 신하들을 제압하거나 정국을 전환하는 방법의 하나로 양위 파동을 사용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미 영조는 5회의 양위 의사를 밝혔다. 재위 15년(1739) 1월, 16년 5월, 20년 1월, 21년 9월, 그리고 25년 1월이었다. 그때 세자의 나이는 각 4, 5, 9, 10, 14세였다. 맨 처음 네 살의 세자에게 양위하겠다는 지시는 공허해 보이기도 한다.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다. 이 사건들은 그 기간에 누적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3년 뒤인 재위 28년(1752) 12월 14일 영조는 양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세자는 극력 만류했다. 그러자 국왕은 “네 효성이 밝혀지면 너를 위해 전교(: 임금의 명령)를 거두겠다”면서 [육아시()]를 읽게 했다. [육아]는 [시경] 소아()의 한 편으로 ‘무성하게 자란 아름다운 채소’라는 의미다. 어떤 효자가 무성하게 자란 풀을 보고 아름다운 채소로 알았지만 살펴보니 쓸모없는 잡초였는데, 부모가 자신을 낳고 기르는 데 수고하면서 큰 인물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해 부모에게 죄스럽다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세자는 그 시의 끝부분에 이르자 부왕 앞에 엎드려 눈물을 줄줄 흘렸다(, , ). 약속대로 전교는 철회되었다. 세자의 나이 17세였고, 밤 3경(23∼1시)의 일이었다.

2년 뒤에도 비슷한 사건이 재발했다. 영조 30년(1754) 12월 대사간 신위()를 종성()에 귀양 보냈는데, 그의 상소에 “지극히 공평하고 크게 중정()해야 한다”는 대목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조는 이 부분을 “내가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라고 지목하면서 “내가 예순의 늙은 나이에 신위에게 속아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너는 어찌하여 글을 상세히 살피지 않았는가?”라고 세자를 꾸짖었다. 계속해서 국왕은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렸다. 세자는 관()을 벗고 뜰에 내려가 석고대죄()한 것이 두 번이었고,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짓찧은 것이 한 번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계속 내렸고,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이번의 소동은 어둑새벽()에나 끝났다(2일).

 

모두 겨울 밤 늦게 벌어진 이 세 번의 사건은 그 무렵 부왕과 세자의 관계를 깊이 비춰준다. 특히 그때 22세로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기절했다가 한참만에야 깨어난 맨 뒤의 사건은 극한적인 감정의 충격을 보여준다.

이런 세자의 정신적 질환은 2년 정도 전부터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영조 31년(1755)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 “동궁이 요즘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세가 있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게 된다”고 아룄다(4월 28일).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사망한 원인을 의대증()이라고 지적했다. 그 증상은 옷 입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세자가 영조를 만나기 싫어 옷을 입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임오화변(: 영조 38년 윤5월 세자가 뒤주에 갇혀 살해된 사건)이 일어난 당일의 기록에서도 “정축년(1757. 영조 33)ㆍ무인년(1758) 뒤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 발작할 때는 궁비(: 궁중의 계집종)와 환시(: 내시)를 죽였고, 죽인 뒤에는 후회하곤 했다. 임금이 그때마다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는 두려워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요컨대 세자는 20세 무렵 부왕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정신적 질환에 걸린 것으로 판단된다.

세자는 결국 폭행, 성폭행, 살인 등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비구니(여자 스님)를 성추행하거나, 연쇄 폭행, 성폭행을 일삼아 수많은 궁녀들을 잡아다가 때리고 성폭행했으며, 내시와 나인들을 많게는 하루에 6명까지 직접 살해하기도 했다. 기록에는 세자가 좁거나 어두운 데 혼자 있으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폐쇄증)에 놓였다고 한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정말로 최극단에 달했고, 세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꿇어앉아 용서를 빌 지경에 이르렀으나 결국 아버지 영조는 사도세자를 용서하지 않고 자결하라고 했으나 소용이 없자 폐서인(평민으로 강제 강등)하며 쌀 담는 뒤주 속에 가둔다. 뒤주 속에 가둬진 세자는 결국 8일만에 갈증과 굶주림 속에 생을 마감했다

후속 조처는 신속하게 이뤄졌다. 장례를 치르고(7월 23일), 즉시 세손을 동궁으로 책봉했다(8월 1일). 2년 뒤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하면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당부했다. ‘갑신처분’이라고 불리는 그 지침에서 국왕은 “종통이 영원히 크게 확정되었으니 사설()에 흔들려 한 글자라도 더 높여서 받들면, 그것은 할아비를 잊은 것이고 사도()도 잊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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