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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영조가 사랑했던 <화평옹주>

by 무님 2020.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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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4월 27일 ~ 1748년 6월 24일)는 조선의 왕족으로, 제21대 왕 영조의 서녀이며, 생모는 영빈 이씨이다. 정조 의소세손의 고모가 된다. 1727년, 4월 27일(양력 6월 16일)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영빈 이씨(暎嬪 李氏) 소생으로 태어났으며 사도세자의 친누나이다.

 

 

영조의 서3녀이자 영빈 이씨의 1남 3녀 중 장녀이다. 화완옹주 화협옹주의 동복 언니이고 사도세자의 동복 누나이며 따라서 혜경궁 홍씨의 시누이가 된다. 영조가 자식들 중 특히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유독 총애했던 것은 유명하다.

1731년(영조 7) 마마를 앓아 영조가 모든 형의 집행을 정지시켰다. 1738년(영조 14) 12세의 나이에 예조참판 박사정(朴師正)의 아들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과 혼인하였다. 박명원은 노론 북학파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8촌 형이 된다. 원래 혼인하면 궁 밖으로 나가는 게 원칙이나 영조가 화평옹주를 아껴서 혼인한 후에도 예외를 적용하여 계속 궁 안에서 살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영조는 자식들을 비정상적으로 편애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모두 영빈 이씨의 소생임에도 불구하고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만 유달리 편애하고 사도세자 화협옹주는 미워했다고 한다. 화평옹주를 보러 갈 때에는 사도세자에게 뭐라도 물어서 대답을 들은 뒤에 귀를 씻고 양치질을 한 다음에 그 물을 화협옹주의 집 방향으로 버리면서 부정을 미리 씻어내려는 듯한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이는 한중록의 기록이다.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6월 24일 정축 2번째기사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화평 옹주가 위독하여 옹주 집에 행행하다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행행하였다. 옹주는 곧 임금의 둘째 딸로 영빈(暎嬪) 이씨(李氏)의 소생이었다.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위독했으므로, 가인(家人)을 시켜 아뢰기를,

"병이 위독하여 다시 천안(天顔)을 모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갑자기 행행하였다. 일이 갑작스러운 데에서 나왔으므로 백관(百官)이 미처 다 모이지 못한 탓으로 여위(輿衛)가 미비하여 의장(儀仗)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옹주가 곧 이어 졸하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였으며, 빈소(殯所)에 임어하여서는 통곡하면서 슬픔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날씨가 매우 무더웠는데 밤새도록 환궁하지 않자, 대신과 여러 신하들, 정원(政院)이 누차 접견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인대(引對)를 허락하지 않고 앉아서 밤을 새웠다. 염습(殮襲)할 때 친림(親臨)하였으며, 일등(一等)으로 호상(護喪)하라고 명하였다.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6월 27일 경진 1번째기사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화평 옹주 집에서 경덕궁으로 환어하다

임금이 옹주의 집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7월 1일 계미 2번째기사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도제조 조현명이 귀주의 상사 때문에 슬퍼함이 지나침을 간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미음(米飮) 같은 음식도 잘 넘기지 못하여 매양 답답한 때가 많다.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한 연후에야 마음이 조금 안정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였다. 도제조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한 귀주(貴主)의 상사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내용을 사책(史冊)에 기록한다면 전하를 어떠한 임금이라고 여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만이 아니라 효장(孝章)077) 의 묘우(廟宇)를 지날 적마다 마음이 항상 답답하였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부모 마음을 잘 알아주는 자식이 있는 것이니, 자부(子婦)의 경우에는 현빈(賢嬪)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딸의 경우에는 화평 옹주(和平翁主)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이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사람됨을 애석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1748년 6월 24일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영조가 그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첫 딸을 낳다가 난산으로 요절했다. 향년 22세. 당시의 기록만으로도 사랑하는 딸을 갑자기 잃은 영조의 충격과 상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영조는 화평옹주의 빈소에 찾아가 밤을 새우며 통곡했는데 날씨가 무더워 임금의 옥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한 신하들이 환궁을 권유했으나 듣지도 않았다고 한다. 화평옹주를 염하는 것도 직접 보고 장례도 호화스럽게 치르려다 신하들에게 너무 지나치다는 간언을 들었는데, 당연히 그것도 듣지 않고 오히려 간한 신하들을 모조리 파직시켰다.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으며, 영조의 친필로 비석을 세웠다.

 

 

* 조선왕조실록 <화평옹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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