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4월 27일 ~ 1748년 6월 24일)는 조선의 왕족으로, 제21대 왕 영조의 서녀이며, 생모는 영빈 이씨이다. 정조와 의소세손의 고모가 된다. 1727년, 4월 27일(양력 6월 16일) 창경궁 집복헌(集福軒)에서 영빈 이씨(暎嬪 李氏) 소생으로 태어났으며 사도세자의 친누나이다.
영조의 서3녀이자 영빈 이씨의 1남 3녀 중 장녀이다. 화완옹주와 화협옹주의 동복 언니이고 사도세자의 동복 누나이며 따라서 혜경궁 홍씨의 시누이가 된다. 영조가 자식들 중 특히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유독 총애했던 것은 유명하다.
1731년(영조 7) 마마를 앓아 영조가 모든 형의 집행을 정지시켰다. 1738년(영조 14) 12세의 나이에 예조참판 박사정(朴師正)의 아들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과 혼인하였다. 박명원은 노론 북학파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8촌 형이 된다. 원래 혼인하면 궁 밖으로 나가는 게 원칙이나 영조가 화평옹주를 아껴서 혼인한 후에도 예외를 적용하여 계속 궁 안에서 살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실 영조는 자식들을 비정상적으로 편애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모두 영빈 이씨의 소생임에도 불구하고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만 유달리 편애하고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는 미워했다고 한다. 화평옹주를 보러 갈 때에는 사도세자에게 뭐라도 물어서 대답을 들은 뒤에 귀를 씻고 양치질을 한 다음에 그 물을 화협옹주의 집 방향으로 버리면서 부정을 미리 씻어내려는 듯한 기이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이는 한중록의 기록이다.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6월 24일 정축 2번째기사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화평 옹주가 위독하여 옹주 집에 행행하다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행행하였다. 옹주는 곧 임금의 둘째 딸로 영빈(暎嬪) 이씨(李氏)의 소생이었다.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위독했으므로, 가인(家人)을 시켜 아뢰기를,
"병이 위독하여 다시 천안(天顔)을 모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갑자기 행행하였다. 일이 갑작스러운 데에서 나왔으므로 백관(百官)이 미처 다 모이지 못한 탓으로 여위(輿衛)가 미비하여 의장(儀仗)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옹주가 곧 이어 졸하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였으며, 빈소(殯所)에 임어하여서는 통곡하면서 슬픔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날씨가 매우 무더웠는데 밤새도록 환궁하지 않자, 대신과 여러 신하들, 정원(政院)이 누차 접견하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인대(引對)를 허락하지 않고 앉아서 밤을 새웠다. 염습(殮襲)할 때 친림(親臨)하였으며, 일등(一等)으로 호상(護喪)하라고 명하였다.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6월 27일 경진 1번째기사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화평 옹주 집에서 경덕궁으로 환어하다
임금이 옹주의 집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7월 1일 계미 2번째기사 1748년 청 건륭(乾隆) 13년
도제조 조현명이 귀주의 상사 때문에 슬퍼함이 지나침을 간하다
내국(內局)에서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미음(米飮) 같은 음식도 잘 넘기지 못하여 매양 답답한 때가 많다.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한 연후에야 마음이 조금 안정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였다. 도제조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한 귀주(貴主)의 상사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런 내용을 사책(史冊)에 기록한다면 전하를 어떠한 임금이라고 여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만이 아니라 효장(孝章)077) 의 묘우(廟宇)를 지날 적마다 마음이 항상 답답하였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는 부모 마음을 잘 알아주는 자식이 있는 것이니, 자부(子婦)의 경우에는 현빈(賢嬪)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딸의 경우에는 화평 옹주(和平翁主)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이제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사람됨을 애석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1748년 6월 24일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영조가 그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
첫 딸을 낳다가 난산으로 요절했다. 향년 22세. 당시의 기록만으로도 사랑하는 딸을 갑자기 잃은 영조의 충격과 상심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영조는 화평옹주의 빈소에 찾아가 밤을 새우며 통곡했는데 날씨가 무더워 임금의 옥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한 신하들이 환궁을 권유했으나 듣지도 않았다고 한다. 화평옹주를 염하는 것도 직접 보고 장례도 호화스럽게 치르려다 신하들에게 너무 지나치다는 간언을 들었는데, 당연히 그것도 듣지 않고 오히려 간한 신하들을 모조리 파직시켰다.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으며, 영조의 친필로 비석을 세웠다.
* 조선왕조실록 <화평옹주의 기록>
- 1. 영조실록 29권, 영조 7년 1월 12일 병자 1번째기사 / 화평 옹주가 마마를 앓으므로, 모든 형옥 처리는 중지하라 명하다화평 옹주(和平翁主)가 마마를 앓으므로, 추국을 우선 정지하고, 모든 죄인을 죽이는 공사(公事)는 정원(政院)에 머물러 두라 명하였다. 정해일(丁亥日)에 이르러 두의(痘醫) 이엽(李燁) 등에게 가자(加資)하고 상을 내렸다.
- 2.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4월 4일 갑진 1번째기사 / 좌의정 서명균이 화평 옹주궁의 토목 역사에 대해 경계하는 말을 하다당상(備局堂上)을 인견하였다. 그때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를 위하여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이현궁(梨峴宮)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그 궁은 바로 능원 대군(綾原大君)의 옛집으로서 내수사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서 오래도록 완공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경계하는 말을 올리자, 임금이 기뻐 하지 아니하...
- 3.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 5월 25일 갑자 2번째기사 / 화평 옹주의 제택 역사에서 발생한 문제를 의논하다그때 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를 위하여 이현궁(梨峴宮)의 제택(第宅)을 수리하였는데, 경복궁(景福宮)의 옛 궁궐의 소나무를 베어 쓰도록 하니, 일을 담당하는 자들이 이것을 빙자하고서 이익을 도모하여, 심지어는 이것을 관재(棺材)로써 발매(發賣)하기에 이르렀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임금에게 묻기를, "이것이 과연 전하의 명령입니까? 조종의 옛터에서 그 ...
- 4. 영조실록 47권, 영조 14년 2월 30일 임자 2번째기사 / 박사정의 아들 박명원이 화평 옹주에게 장가들어 금성위로 봉작되다박사정(朴師正)의 아들 박명원(朴明源)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에게 장가들어 금성위(錦城尉)로 봉작되었다.
- 5. 영조실록 58권, 영조 19년 12월 3일 임자 2번째기사 / 숙빈묘에 거둥하고, 이어 화평 옹주의 집에 나아갔다가 밤 2경에 환궁하다임금이 숙빈묘(淑嬪廟)에 거둥하고, 이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나아갔다. 이때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옹주의 집 낭하(廊下)에 늘어앉아 반열이 모양을 이루지 못한 채 기상이 침통하였는데, 임금이 바야흐로 몹시 노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밤이 되었는데도 임금이 오히려 회가(回駕)하지 않으니, 정원·옥당 및 병조 판서 서...
- 6. 영조실록 60권, 영조 20년 9월 13일 정해 2번째기사 / 조관빈에게 명하여 9일제를 성균관에서 설시하고 박창원 등 7인을 뽑다(放榜)하게 되자, 모두 급제를 주었다. 박창원은 곧 화평옹주(和平翁主) 부마인 박명원(朴明源)의 형이었다. 절일제(節日製)에서 두 사람에게 급제를 주는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임석헌은 일찍이 임술년에 임금이 시학(視學)하였을 때에는 경생(經生)으로서 입시하니, 임금이 마음으로 그를 가상하게 여겼었는데, 세마(洗馬)가 되기에 미쳐서는 특별히 소견하고...
- 7.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6월 24일 정축 2번째기사 / 화평 옹주가 위독하여 옹주 집에 행행하다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행행하였다. 옹주는 곧 임금의 둘째 딸로 영빈(暎嬪) 이씨(李氏)의 소생이었다.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위독했으므로, 가인(家人)을 시켜 아뢰기를, "병이 위독하여 다시 천안(天顔)을 모실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자, 임금이 갑자기 행행하였 다....
- 8.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6월 24일 정축 3번째기사 / 화평 옹주의 계후를 박수현으로 정하게 하다하교하기를, "화평 옹주의 계후(繼後)는 진사(進士) 박흥원(朴興源)의 제3자(第三子) 박수현(朴壽賢)으로 정하라는 내용으로 예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 9.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6월 25일 무인 1번째기사 / 화평 옹주 집에 있으면서 창덕궁으로 이차하라고 명하다임금이 화평 옹주의 집에 있으면서 창덕궁(昌德宮)으로 이차(移次)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옹주의 집에 있을 적에 비가 심하게 내렸으므로 백관과 군병들이 하루 종일 비를 맞았다. 오후에 창덕궁으로 이차하게 하자 뭇 신하들이 간쟁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이는 장차 다시 염빈(殮殯)에 임어하기 위해서였다. 사신은 말한다. "왕자(王者)가 상(喪)에 임어하는 데에는 본래...
- 10.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6월 26일 기묘 1번째기사 / 대신이 간쟁해도 화평 옹주 집에 행행하다임금이 또 화평 옹주의 집에 행행하였는데, 대신(大臣)이 간쟁하였어도 되지 않았다. 옥당(玉堂)에서 차자를 진달해도 비답하지 않은 채 도로 내어 주었다. 이때 대관(臺官)들은 모두 나오지 않았으므로, 한마디도 간쟁한 사람이 있지 않았다. 단지 공조 판서 조관빈(趙觀彬), 호조 참의 윤광의(尹光毅)가 상소하여 간쟁했으나 정원에서 직분을 넘어선 말이라는 것으로...
- 11. 영조실록 67권, 영조 24년 6월 27일 경진 1번째기사 / 화평 옹주 집에서 경덕궁으로 환어하다임금이 옹주의 집에서 경덕궁(慶德宮)으로 환어(還御)하였다.
- 12.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7월 1일 계미 2번째기사 / 도제조 조현명이 귀주의 상사 때문에 슬퍼함이 지나침을 간하다부모 마음을 잘 알아주는 자식이 있는 것이니, 자부(子婦)의 경우에는 현빈(賢嬪)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딸의 경우에는 화평 옹주(和平翁主)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데, 이제 갑자기 이 지경 에 이르렀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의 사람됨을 애석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다." 효장(孝章) 효장 세자. 뒤에 진종(眞宗)으로 추존됨. 하였다.
- 13.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7월 3일 을유 1번째기사 / 화평 옹주의 상에 들른다하여 대신이 간쟁했으나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꾸짖다廟)에 전배(展拜)하고 환궁할 때 지나다가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상(喪)에 들른다 하니, 대신과 약원(藥院)에서 간쟁하였는데, 임금이 수레를 탈 때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면서 말하기를, "경 등이 기필코 간쟁하려 한다면 모름지기 원직(院直)하게 하겠다." 하자, 대신이 감히 간쟁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땅에 엎드려 죄줄 것을 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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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윤7월 29일 신사 1번째기사 / 화평 옹주의 집으로 행행하니 전후 곡림한 것이 모두 다섯번이다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으로 행행하였다. 이때 옹주의 장일(葬日)이 앞으로 닥쳐오기 때문에 한번 결별(訣別)하려고 드디어 그 집에 임하였으니, 전후 곡림(哭臨)한 것이 모두 다섯 번이었다.
- 16.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8월 2일 갑신 1번째기사 / 화평 옹주를 장사지냈는데 의물의 성대함이 국장에 버금갈 정도였다화평 옹주(和平翁主)를 장사지냈는데, 의물(儀物)의 성대함이 국장(國葬)에 버금갈 정도였다. 분묘(墳墓)를 만드는 데만도 수개월이 걸렸으므로 기읍(畿邑)의 백성들이 그 때문에 농사를 폐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 옹주가 하가(下嫁)할 때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귀주(貴主)들의 혼인에 매양 주혼(主婚)하여 왔었다...
- 17.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8월 4일 병술 2번째기사 / 화평 옹주의 집에 행행하였는데 밤에 되어서야 환궁하다임금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행행하였는데, 밤이 되어서야 환궁(還宮)하였다.
- 18. 영조실록 68권, 영조 24년 8월 10일 임진 2번째기사 / 명릉에 행행하였는데, 융복을 갖추고 교자를 타다사배례를 행하였다. 이어 익릉·경릉으로 나아가서 홍 살문 밖에 이르러 사배례를 행하고 능상(陵上)과 정자각(丁字閣)의 봉심을 의주(儀註)대로 하였다. 임금이 융복을 갖추고 깃을 꽂은 다음 경릉의 재실(齋室)에서 회가(回駕)하였다. 그리고 승지를 나누어 보내 창릉과 순회묘(順懷墓)를 봉심하게 하였다. 오는 길에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임어하였다가 환궁하였다.
- 19. 영조실록 69권, 영조 25년 2월 11일 기축 1번째기사 / 4경에 임금이 익선관·참포·오서대를 갖추고 의식대로 제사를 지내다4경에 임금이 익선관·참포·오서대를 갖추고 의식대로 제사를 지냈다. 제례를 마친 뒤 마산(馬山)을 거쳐 가니 이곳은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묘였다. 낮에 파주(坡州)에서 머무른 뒤 해질 무렵 소령묘(昭寧墓)에 이르렀다.
- 20. 영조실록 69권, 영조 25년 5월 5일 임자 1번째기사 / 의식대로 단오제를 거행하고 돌아올 때 화평 옹주의 제택을 들르다임금이 빠른 걸음으로 전내(殿內)에 나아가 단오제 행하기를 의식대로 거행하고, 돌아올 때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제택(第宅)을 지나며 들렸다.
- 21. 영조실록 69권, 영조 25년 5월 13일 경신 3번째기사 / 교리 서지수가 지난날 화평 옹주의 집에 들린 것을 아뢰니 엄한 하교를 내리다"지난날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제택에 거둥하시어 밤 늦게 궁궐로 돌아오는 실수를 범하셨습니다." 하니,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임금이 엄한 하교를 내리자, 서지수가 두려워 중지하였고 부교리 이응협(李應恊)은 곁에 있으면서 겁이 나서 떨 뿐이었다. 이어서 형조 참판 홍계희(洪啓禧)에게 살옥수(殺獄囚) 3인을 사형에서 감하여 정배(定配)하도록 처결하라고 명하였다.
- 22. 영조실록 69권, 영조 25년 6월 23일 기해 2번째기사 / 임금이 금성위 박명원의 집에 거둥하였는데 이 날이 화평 옹주의 소상이다원(朴明源)의 집에 거둥하였는데, 이 날이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소상(小祥)이었다. 임금이 그 대문에 이르러 남여(藍輿)에서 내려와 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배종(陪從)한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오륜(五倫)도 없는가? 모름지기 나에게 하루의 여가라도 허락하라." 하고, 임금이 화평 옹주를 생각하는 슬픔이 심하여 자주 그 집에 거둥하였으나, 여러 신하...
- 23. 영조실록 71권, 영조 26년 1월 3일 정미 1번째기사 / 종묘에 참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화평 옹주의 집에 들르다임금이 종묘에 참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들렀다.
- 24. 영조실록 73권, 영조 27년 1월 9일 정미 2번째기사 / 태묘·영희전을 전알한 뒤 화평 옹주의 집에 들르자, 이현중 등이 회가를 청하다(永禧殿)을 전알(展謁)한 뒤 지나는 길에 화평 옹주(和平翁主)의 집에 들렀다. 교리 이현중(李顯重) 등이 차자(箚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적에 군주의 거둥은 반드시 기록하였으니, 군주는 스스로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전하께서 화평 옹주의 집에 지나는 길에 들르신 것이 지금 몇 차례입니까? 돌아보건대, 이제 세월이 누차 바뀌어 옛자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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