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는 조선 제9대 성종의 계비(繼妃)이자 제10대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판봉상시사(判封常寺事) 윤기무(尹起畝)의 딸로 어머니는 고령 신씨(高靈 申氏)이다. 외할아버지인 신평(申枰)은 신숙주(申叔舟)의 숙부(叔父)이다.
그녀의 본관은 함안이고, 1455년 출생하여 어릴 때 궁궐로 입궁을 해 당시 자신보다 2살 나이가 어렸던 성종의 성총으로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제헌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은 집현전에 출입을 할 수 있을 만큼 학문에 밝은 이였고, 판봉상시사라는 벼슬을 하사받았으나 일찍 세상을 떴다. 제헌왕후 윤씨의 생모 신씨는 윤기현의 두번째 부인이었는데 윤씨를 가졌을 때 태몽은 온 집안에 불빛이 환하게 비춰들었다고 한다.
윤씨는 성종(成宗, 1457~1494)의 후궁(後宮)으로 간택되어 1473년 3월 19일 종2품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윤씨는 입궐 후 검소하고 온화한 태도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왕실에는 세 명의 대비(大妃) 즉 정희왕후(貞熹王后)·안순왕후(安順王后)·소혜왕후(昭惠王后)가 있었는데, 윤씨는 이들 또한 극진하게 봉양하여 신뢰를 얻었다.
윤씨가 입궐한 다음 해인 1474년 4월 성종의 첫 번째 왕비였던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韓氏)가 19세의 나이로 자녀 없이 사망하였다. 성종은 대왕대비(大王大妃)였던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1476년 7월 11일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삼으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에 따라 윤씨는 같은 해 8월 9일 인정전(仁政殿)에서 왕비로 책봉되었고 아버지 윤기견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촌되었다. 당시 윤씨는 임신 중이었는데 왕비가 된 후 4개월 후인 1476년 11월 7일에 연산군(1476~1506)을 낳았다.
윤씨의 좋지 못한 행동들에 대한 기록은 연산군이 태어난 이후부터 나타났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윤씨는 질투심이 많아 성종이 총애하는 후궁들을 음해했으며 성종에게도 공손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성종을 비롯하여 세 명의 대비, 후궁들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77년 3월 윤씨가 왕과 주변의 후궁들을 독살하기 위해 비상(砒霜)을 숨겨두었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윤씨에 대한 폐비 논의가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신하들의 반대로 폐비는 이루어지 않았고, 윤씨가 별궁에서 근신하게 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이후 윤씨는 둘째 아들 즉 연산군의 동생까지 낳았으나 1479년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또다시 폐비 논의에 휩싸였다. 이때 윤씨는 성종의 후궁들과 대비들과의 관계가 틀어져 있었고 성종과의 갈등도 심화된 상태였다. 폐비를 반대하는 의견도 거세게 일었으나, 결국 윤씨는 1479년 6월 2일 폐서인(廢庶人) 되어 사가로 쫓겨났다.
이후 연산군의 세자책봉이 거론되면서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제기되었다. 이에 대하여 성종은 훗날 폐비 윤씨로 인한 문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였다. 성종은 곧이어 삼정승과 6조의 판서 및 대간(臺諫)들을 불러 폐비윤씨의 처분에 대해 논하였고, 결국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폐비 윤씨는 1482년 8월 16일 사약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에 있는 조선전기 제9대 성종의 비인 폐비 윤씨의 무덤이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산 5번지 경희의료원 자리에 위치했으나, 1969년 10월 25일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의 서삼릉(西三陵) 경내로 이장되었다. 윤씨는 1479년 폐출당했으며, 1482년(성종 13) 8월에 사약을 받았다. 이 때 성종은 예조에 교지를 내려 폐비 윤씨의 묘소를 ‘윤씨지묘(尹氏之墓)’라 표시하고, 묘지기 2인을 배치, 소재지 관원에게 민속적인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며 영구히 고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1494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1496년 효사묘(孝思廟)라는 사묘(私廟)를 짓고, 윤씨의 묘를 수봉해 회묘(懷墓)라 하였다.
그 뒤 1504년 갑자사화를 겪고 난 뒤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고 회묘를 회릉으로, 효사묘를 혜안전(惠安殿)으로 승격시켰으며, 모든 석물(石物)을 왕릉의 형식과 같이 하는 한편 제향 절차도 종묘 의식과 같게 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자 회릉은 회묘로 강봉되고, 혜안전도 철폐되어 윤씨의 신주(神主)는 묘 곁에 묻혔다. 석물은 봉분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다가 서삼릉 내 귀인(貴人)·숙의 묘역 바로 뒤로 이장되었다.
이장된 회묘는 곡장이 불타 기단부만 남았다. 봉분을 두른 난간석도 일부 무너졌으나, 문인석·무인석 등 다른 석물과 함께 조선 초기 왕릉의 석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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