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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성종실록

by 무님 2020.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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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은 조선왕조 제9대 왕 성종의 재위기간 1469년 11월에서 1494년 12월인 25년 2개월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성종강정대왕실록>이며, 모두 297권 150책으로 활판으로 인쇄되었다.

<성종실록>은 제14권 성종 3년 정월부터 기사의 다소에 상관없이 반드시 1개월을 1권으로 편철하였기 때문에 권수가 많아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성종실록은 성종이 세상을 떠난 지 4개월 뒤인 1495년인 연산군1년 4월에 영의정 노사신 등의 건의로 춘수관 안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을 시작하였다. 편찬 도중인 1498년인 연산군4년에 김일손이 실록청에 제출한 사조 가운데 그의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화술주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신진 사림들이 큰 화를 당하기도 했으나 실록 편찬 작업은 계속 진행되어 이듬해인 1499년 3월에 인쇄가 완료되었고 4대 사고에 봉안되었다.

실록 편찬에는 영의정 신승선과 우의정 성준이 총재관으로, 지관사 이극돈 이하 동지관사 안침 등 15인이 실록청 당상으로, 편수관 표연말 이하 74인은 모두 실록청 낭청으로 참여하였다. 

성종의 시호는 강정, 존호는 인문헌무흠성공효이고, 묘효는 성종이며, 능호는 선릉으로 현재 서울 강남구 삼성도에 있다.

 

 

<성종실록>의 내용

성종의 이름은 혈이며, 세조의 손자로 의경세자(추존 덕종)와 소혜왕후 한씨의 둘째 아들이다. 처음에 자산군에 봉해졌다가 뒤에 자을산군으로 고쳤다. 1469년 11월 예종이 왕위에 오른 지 1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 정희왕후가 그를 지명하여 왕위를 계승토록 하였다. 예종에게는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어렸고, 또 성종의 형 월산군도 있었으나 병약하였기 때문에 성종이 지명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종의 즉위 초기에는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고 원로 대신 신숙주, 한명회, 구치관, 최항 등이 원상이 되어 국정을 보필하였다.

성종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집현전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홍문관을 창설하고 어진 선비를 이에 임명하여 날마다 경연을 열어 고금의 치란과 지성의 득실을 연구하였다. 그는 세조 대부터 편찬하기 시작한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를 완성하여 조선왕조 5백 년간의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삼국시대 이래로 숭상해 오던 불교를 억압하고 유학을 숭상하여 유교국가의 토대를 확고히 하였다.

이 때문에 성종 대에는 유교적 정치이념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사림정치가 시작되던 시기였으므로 이를 표방하는 삼사의 언론활동이 두드러지게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성종 대에는 민족문화에 관한 서적인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동문선> 등을 편찬하였다.  성종은 크게 문화를 일으키고, 국방과 외교에도 힘을 기울였다. 우리나라의 평안도와 함경도를 자주 침입하는 야인 정벌하고, 남쪽의 왜인에 대해서는 삼포를 중심으로 한 무역을 증진하여 내치 외교에 큰 업적을 세워 조선왕조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성종의 태실이야기

 

 

9대 임금 성종의 태실과 태실비는 창경궁의 양화당 뒷편 춘당지로 가는 언덕 기슭에 있다.
성종은 세조 3년(1457) 출생한 후 세조 4년(1458)에 태종에 장태되었음을 태지석을 통해 알 수 있다. 성종 2년(1471)에 태실 가봉이 있었다. 태실비 후면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처음 건립된 후 3차례에 걸쳐 다시 세웠던 기록이 남아있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시 태전동에 있던 것을 1930년 일제 강점기에 전국에 흩어져있던 태실들을 서삼릉으로 옮기면서, 창경궁에 설립한 이왕가박물관의 진열품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성종대왕의 태실을 이곳에 옮겨왔기 때문이다.

 

성종 태실지

 

성종대왕의 태실은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 조각위에 비를 세우고, 비의 머리는 용의 머리 형상을 정교하게 새겨 넣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조각도 거북의 머리 부분은 미소를 띤 듯한 상서로운 느낌을 보인다. 익살스럽고 친근한 느낌을 주는 거북이다. 등과 다리 등도 세심하게 조각했다. 앞발은 앞으로 내밀어 힘찬 느낌을 준다.
태실을 줄러친 난간석의 동자 기둥들이 곰을 형상화한 모습처럼 매우 섬세하고 재미있게 조각되어 있다.
지주가 되는 동자 기둥의 사이에 놓은 돌기둥도 윗 부분과 아래 부분은 사각형이다. 하지만 중간에는 원형으로 다듬고 문양을 넣었다. 기둥에 올려진 보로 쓰인 돌들도 팔각기둥으로 정성을 들여 제작해서 왕실의 권위와 품위를 곁들였다. 태실은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석종형 몸체를 놓고 팔각형의 지붕돌을 얹었다. 상륜부에는 보주로 장식하였고, 그 주위는 팔각으로 난간석을 둘렀다. 난간석의 조각도 매우 정교해서 섬세하게 정성을 깃들여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종의 태지, 태호

 

태실비의 명문을 보면,
(전면 : 成宗大王胎室, 후면 : 成化七年閏九月日立 : 萬曆六年五月日改立 / 順治九年十月日改立 / 道光三年五月日改立)
(전면 : 성종대왕태실, 후면 : 성화칠년윤구월일립 : 만력육년오월일개립 / 순치구년십월일개립 / 도광삼년오월일개립)
으로 기록돼 있다. 왕세자 때 세웠을 것으로 보이는 아기태실비는 남아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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