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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성종시대 대학자, 훈군파 학자 최항

by 무님 2020.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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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은 조선 초기의 훈구파 대학자이며 세조를 도와 문물제도 정비에 크게 공헌했다. 역사, 언어 등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1434년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 부수찬이 되어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 1461년에는 양성지()의 《잠서()》를 국역 간행하고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 조선 초기의 법률제도를 집대성했다.

 

본관은 삭녕(). 자는 정보(), 호는 태허정()·동량(㠉). 최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윤문()이고, 아버지는 증영의정 최사유()이다. 어머니는 오섭충()의 딸이다. 서거정()의 자부()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이 해『자치통감훈의()』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어 박팽년()·신숙주()·성삼문() 등과 같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44년 집현전교리로서 『오례의주()』를 상정()하는 일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박팽년·신숙주·이개() 등과 함께 『운회()』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1445년 집현전응교로서 『용비어천가』를 짓는 일에 참여하고, 이어 『동국정운』·『훈민정음해례』 등을 찬진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에 5등으로 급제, 집현전직제학 겸 세자우보덕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세종은 세자(뒤의 문종)로 하여금 섭정()하게 했는데 이 때 서연관()으로서 정치에 보좌함이 컸다.

1450년(문종 즉위년)에 선위사(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접대했고, 같은 해 언관()으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이 해 7월 다시 집현전으로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고, 『대학연의()』를 주석하는 일을 맡았으며, 『고려사』의 열전을 집필하였다. 1452년 2월『세종실록』 편찬 때는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이어 동부승지가 되었으며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협찬한 공이 있다 하여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에 녹훈되고, 도승지가 되었다. 이 해 12월 이조참판에 임명되고, 영성군()에 봉해졌다. 1454년 10월에는 <공신연곡()> 4장()을 지어 올렸으며, 1455년 정난공신 1등의 교서가 내려졌다.

그 해 2월 대사헌이 되고, 6월에 세조가 즉위하면서 좌익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이어 7월에 서연의 우부빈객이 되었고, 그 뒤 호조참판·이조참판·형조판서·공조판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세조는 즉위한 직후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경국대전』 편찬에 착수하였는데 이 때 그는 김국광()·한계희() 등과 함께 육전상정관()으로 임명되었고, 1458년(세조 4)에 『신육전()』의 초안을 작성하여 올렸다.

그 해 부친상을 당했으나 왕명으로 기복()되어 다음 해 중추원사세자빈객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1460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461년양성지()의 『잠서()』를 한글로 번역, 간행하였다.

1463년 의정부우참찬이 되고, 1464년 9월 왕명으로 『병장설주()』를 산정()하였다. 이듬해 좌참찬 겸 세자이사()가 되었고, 사서오경의 구결()을 바로잡는 일에 참여하였다.

1466년에 판병조사로 임명되자 그는 군사 관계는 적임이 아니라며 간절히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67년 4월 좌찬성, 5월 우의정, 7월 좌의정, 9월 영의정이 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9월신숙주·한명회()·김국광 등과 함께 원상이 되었다. 1469년 경국대전상정소 제조(調)를 겸하여 『경국대전』을 찬진했고, 이어 『무정보감()』을 찬수하였다.

1470년(성종 1) 부원군에 봉해졌고, 『역대제왕후비명감()』을 찬진하였다. 1471년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 1등에 녹훈되고 다시 좌의정이 되어 경연춘추관사를 겸하면서 『세종실록』·『예종실록』을 찬진하였다. 그 뒤 1474년 4월에 죽었다.

 

최항의 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있는 조선전기 문신 최항의 무덤이 있다. 봉분은 비교적 얕게 형성된 사성()을 돌렸고, 봉분 전면에는 화강암으로 반원형의 돌을 세워 봉분의 끝을 맺었다. 봉분 좌우측에는 묘표()가 있는데, 우측의 것은 예전의 묘표이고, 좌측의 것은 새로 만든 것이다. 전면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방형의 장명등()이 배치되었다. 좌우로 문인석이 위치한다.

좌측 문인석의 석단 아래에 묘비() 두 개가 나란히 옆을 향해 놓여 있다. 봉분 쪽으로 놓여 있는 오른쪽의 묘비는 묘역 설립 당시에 건립한 것으로, 그의 처남인 대제학 서거정()이 글을 지었다. 상석과 왼쪽의 묘비는 오석()으로 제작한 것으로, 그의 17대손이 설치한 것이다. 신도비는 건너편 금란산 밑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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