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광은 조선전기 병조정랑, 한성부판윤, 장악원제조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서얼 출신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예종 때에는 ‘남이의 옥’을, 연산군 때에는 무오사화를 주도하며 공신의 지위에 올랐다.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字)는 우후(于後)이다. 부윤(府尹)을 지낸 유규(柳規)의 서자(庶子)로 전라도(全羅道) 남원부(南原府)에서 태어났으며 모친은 최씨(崔氏)이다.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낸 오성군(筽城君) 유자환(柳子煥)의 서제(庶第)이다. 함양호장(咸陽戶長)을 지낸 박치인(朴致仁)의 딸과 결혼하여 유방(柳房)과 유진(柳軫) 등을 낳았다.
1467년(세조 13) 왕실의 호위병인 갑사(甲士)로 있다가 하번(下番)하여 고향인 남원에 머무르고 있다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세조(世祖, 재위 1455~1468)에게 상서(上書)하여 자진하여 출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의 글을 보고 기꺼워한 세조는 그를 궁으로 불러들여 이시애를 토벌할 방략을 묻고는 왕을 호위하는 겸사복(兼司僕)으로 충원하였다. 유자광은 몸이 날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할 뿐 아니라 문장과 학식에도 뛰어나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68년에 세조가 세자와 더불어 온양으로 행차할 때 총통장(總筒將)으로 호위하였고,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가 되었다. 이어 호송관(護送官)으로 유구국(琉球國: 현재의 오키나와) 사자를 호송하였다.
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睿宗, 재위 1468~1469)이 즉위하자 유자광은 왕실의 종친(宗親)이던 겸사복장(兼司僕將) 남이(南怡)가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 강순(康純) 등과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변하여 이른바 ‘남이의 옥(獄)’을 주도하였다. 이 일로 유자광은 정난익대공신(定難翊戴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으며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고 무령군(武靈君)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남이의 집과 강순의 아내 중비(仲非), 민서(閔敍)의 딸 민말금(閔末今) 등을 받았다.
‘남이의 옥’ 이후 유자광은 예종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유자광은 1469년(예종 2) 위장(衛將)인 응양장군(鷹揚將軍)으로 임명되었다. 예종은 그해에 유자광의 동모제(同母弟)인 유자형(柳子炯)이 서얼 출신이라는 이유로 생원시 응시가 가로막히자 직접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라고 명했으며, 유자광의 아버지인 유규에게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의 벼슬을 내렸다.
1470년(성종 1)에는 응양장군(鷹揚將軍)에 봉해졌고, 열무정(閱武亭)에서 진법을 훈련하는 데 중상대장(中廂大將)이 되었다. 또한 예종은 유자광을 익대공신으로서 각(閣)을 세워 형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 벼슬을 주되, 3계급을 뛰어올리게 하고, 적자(嫡子)와 장자(長子)는 세습하여 그 녹(祿)을 잃지 않게 했으며,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게 하는 등 친히 교서를 내려 위로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 유자광의 반인(伴人)이 난언을 고함으로써 서소(西所)에 구금될 처지에 놓였으나 대왕대비의 비호로 풀려났다. 그 뒤 숭정대부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1476년(성종 7)에는 한명회(韓明澮)를 모함한 것이 드러났으나 임금이 죄를 묻지 않았고, 1477년에는 대신들이 서얼인 유자광을 도총관(都摠管)에 임명할 수 없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도총관으로 삼을 정도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1478년(성종 9) 유자광은 현석규(玄碩圭)를 탄핵하다가 임사홍(任士洪)·박효원(朴孝元) 등과 붕당(朋黨)을 이루려 한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오히려 경상도(慶尙道) 동래(東萊)로 유배되었다. 하지만 성종은 그에 대한 신임을 거두지 않아 이듬해 유배되어 있던 그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돌려줄 것을 명하기도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유자광은 1480년(성종 11) 병든 모친을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게 해 달라고 성종에게 탄원하여 남원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그리고 1485년(성종 16) 서용(敍用)되어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로 임명되었다.
유배 생활을 마치고 다시 조정으로 복귀한 유자광은 1486년(성종 17) 정조사(正朝使)로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1487년에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홍치제(弘治帝, 재위 1487~1505)의 즉위에 맞추어 명나라로 파견된 사절단에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다녀왔다. 1488년(성종 19)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유자광은 성종에게 의주(義州)·동팔참(東八站)·요동(遼東)·광녕(廣寧) 등지의 산천과 도로의 형세를 나타낸 지도를 바치며 북방의 방어를 위해 의주에 성 쌓는 일이 중요함을 간언하였다. 그리고 북경(北京)에서 가져온 《역대명신법첩(歷代名臣法帖)》도 바쳤다.
1489년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로 임명된 유자광은 성종이 죽고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이 즉위한 1494년(연산군 1)에 모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497년(연산군 3)에 다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으며, 이듬해인 1498년(연산군 4)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있음을 내세워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주도하였다. 그해에 유자광은 숭록무령군(崇祿武靈君)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는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尹氏)의 폐비에 찬성했던 이극균(李克均,1437~1504)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충군형(充軍刑)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506년 복직된 유자광은 그해에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반군이 궁궐에 진입할 수 있게 도왔다. 이때의 공으로 중종(中宗, 재위 1506~1544)이 즉위한 뒤에 1등 공신으로 책봉되어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의 지위에 올랐다. 그리고 1507년(중종 2) 관직의 최고 품계인 대광(大匡)의 지위에 올랐다. 당시 유자광은 김종직의 여당(餘黨)이 자신을 중상하려 한다며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을 하겠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예견처럼 조정의 요직을 장악한 사림(士林) 세력은 유자광을 탄핵하였고, 중종은 결국 이를 받아들여 유자광을 평해(平海)로 유배하였다. 유자광의 아들인 유방과 유진, 손자 유승건(柳承乾), 유승곤(柳承坤) 등도 모두 유배되었다.
유자광은 1512년(중종 7) 유배지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인 유방도 스스로 목매어 목숨을 끊었다. 중종은 유자광이 죽은 뒤에 그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키고 예장(禮葬)할 것을 명령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유자광은 1908년(순종 1)에야 죄명을 벗고 원래의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다.
묘소는 남원의료원 동쪽으로 300m쯤 떨어진 야산에 있다. 비석은 광한루에서 운봉으로 가는 길에 나오는 첫 번째 언덕(묘가 있는 야산)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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