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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유네스코 세계유산 < 한국의 아름다운 서원 >

by 무님 2021.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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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은 2019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문화재로, 성리학의 이념으로 설립된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서원() 9곳을 묶은 것이다. ‘한국의 서원’에는 영주 소수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이 포함된다.

 

소수서원

 

서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시작된 교육기관이다. 한국의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설립된 것으로 인재 교육과 함께 선현의 제사를 지낸다는 목적도 있었으며, 사림의 향촌 활동 구심체로 정치적·사회적 기구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한국의 서원은 조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영주 순흥에 지은 백운동서원()에서 시작해 명종 때 이황이 서원의 공인화와 체제 정비에 앞장서면서 교육기관으로서 정착·보급되기 시작했다. 풍기군수로 부임할 당시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서적, 노비 등을 하사했는데 이와 같은 국가 공인 서원을 사액서원이라 했다.

서원 구조는 크게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과 교육 공간인 강당, 유생이 머무르는 서재·동재 등으로 구성된다. 이외에도 책을 보관하는 서고와 서적을 만드는 장판고(), 제사를 위한 제기고() 등이 있었다. 건축물은 자연을 감상하면서 몸과 마음을 키울 수 있도록 자연과의 조화를 고려해 지어졌으며, 선비정신에 걸맞게 건물 장식을 최소화하여 검소하게 꾸며졌다.

서원은 양적으로 증가하면서 교육뿐 아니라 향촌에서의 다양한 문제를 논의하는 운영기구로 기능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숙종 이후 과도하게 범람하면서 붕당정치의 기반으로 당쟁에 가담하고 양민을 착취하는 등의 폐단이 늘어나 철폐론이 대두했다. 고종 1년에는 흥선대원군이 서원에 대한 모든 특권을 없애고 전국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 한국의 아름다운 서원 세계유네스코 등재 9

 

소수서원()

경북 영주에 위치한 조선시대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사액서원은 조선 시대 왕으로부터 편액(扁額)·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을 말한다. 조선 중종 38년(1543)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국내 주자학의 효시인 고려시대 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한 백운동 서원이 사액받으면서 '소수서원'이 됐다. 소수서원은 가장 먼저 설립된 서원으로서 한국 서원의 강학 및 제향과 관련된 규정을 처음 제시한 기본 모델로 평가받는다. 소수서원에서는 이황의 문인인 김성일 등 4000여 명의 인재가 배출됐다.

 

 

남계서원()

강당 영역이 앞에 있고 사당 영역이 뒤에 있는 조선 시대 서원 배치의 전형을 처음으로 제시한 서원으로 경남 함양에 위치한다. 1552년(명종 7) 경남 함양 출신인 조선 시대 학자 정여창(鄭汝昌,1450~1504)을 모시기 위해 설립됐으며, 1566년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남계서원은 지역 사림들만 주도해 설립된 최초의 사원으로 민간인인 사림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한 점이 특징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경남의 의병활동을 주도한 서원이기도 하며, 이에 1595년(선조 28) 왜군에 의해 전소됐으나 1603년(선조 36) 바로 재건되기도 했다. 

 

 

옥산서원()

회재() 이언적(, 1491~1553)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1573년 설립한 서원으로 경북 경주에 있다. 1574년 옥산이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 철폐되지 않은 47곳의 서원 중 하나이다. 옥산서원은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남향이 아닌 서향으로 중심 건물들이 배치된 특징을 지닌다. 옥산서원에는 19세기 말 조정의 일방적 근대화 정책에 반발해 성리학 전통을 고수한 8849명의 서명 상소인 만인소가 소장돼 있으며, 16세기 명필인 한호(1543~1605)와 19세기 명필 추사 김정희(1786~1856)의 편액이 걸려 있다.

 

 

도산서원()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이 학문을 하며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을 모체로 하여, 퇴계 이황 선생 사후 4년째인 1574년 건립된 서원으로 경북 안동에 있다. 특히 이듬해인 1575년 선조는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 서원은 이황의 문인 및 제자들의 학술공간으로서 성리학과 관련된 다양한 철학적 논쟁이 펼쳐졌으며, 정조는 1792년(정조 16) 이황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서 7000여 명이 참가한 특별과거를 실시하기도 했다. 주변환경이 특히 뛰어나 도산서원의 경관을 주제로 한 시문이 3000여 점에 이르기도 한다.

 

 

필암서원()

김인후(厚, 1510~1560)의 도학을 추모하기 위해 1590년 건립된 서원으로, 전남 장성에 위치한다. 필암서원은 평지에 세워진 서원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24년 복원되었으며, 1662년(현종 3) 지방 유림들의 청액소()에 의해 ‘필암’이라고 사액되었다. 필암서원은 동남부 지역에서 시작된 서원운동이 서남부 지역까지 확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필암서원에는 노비의 명단과 계보도인 노비보가 현존해 있는데, 이는 국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노비족보다.

 

 

도동서원()

한훤당() 김굉필(, 1454∼1504)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대구 달성에 위치해 있다. 1605년 보로동 서원으로 건립돼 1607년 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제사가 끝난 뒤 술이나 제물을 먹는 음복례를 엄격하게 시행하는 곳으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제관 모두가 음복례를 해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도동서원은 낙동강을 북쪽으로 바라보게끔 건립돼 건물이 대부분 북향이며, 경사지를 활용한 서원의 건축배치를 탁월하게 구현해냈다. 인근에는 김굉필의 묘소가 있는데, 도동서원은 묘제와 서원 제향을 결합한 유일한 서원이다.

 

 

병산서원()

조선 선조 때의 재상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을 향사한 서원으로 경북 안동에 위치한다. 1613년(광해군 5) 설립됐으며 1863년(철종 14)에 사액사원으로 승격되었다. 병산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당시 철폐되지 않고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병산서원은 최초로 유생 수천명이 연명한 유소를 올린 곳으로, 지역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서원이었다. 병산서원은 2010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의 일부이기도 하다. 경관에 있어서도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된 누마루인 만대루(晩對樓)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돈암서원()

1634년(인조 12) 건립된, 조선시대 예학(禮學)을 대성한 유학자인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을 추모하기 위해 그 위패를 모신 곳이다. 현재 충남 논산에 위치한다. 예학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 질서를 바로 세우기 위해 연구된 학문으로, 김장생의 학문세계는 그의 아들인 김집(1574~1656)을 통해 조선 후기 송준길(1606~1672), 송시열(1607~1689)에게 이어졌으며 이 인물들은 돈암서원에 추가로 배향됐다. 돈암서원은 1660년(현종 1)에 ‘돈암()’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이 되었다.

 

 

무성서원()

1696년 지방관의 향촌민에 대한 학문 부흥을 목적으로, 마을 가운데 세워진 서원이다. 전북 정읍에 위치한다. 원래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을 제향하기 위한 태산사()였으나, 1696년(숙종 22)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되었다. 지역사회의 강학과 성리학 연구를 중심으로 했던 다른 서원들과 달리 무성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은 향촌 교육과 연계돼 성리학의 가치를 보급하고 학문을 권장했다. 무성서원은 특히 향촌 자치규약인 향악과 관련이 깊어 지역민 결집에 중요 역할을 했고, 최익현(1833~1906)과 임병찬(1851~1916) 선생이 바로 이 무성서원에서 항일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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