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는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의 맏아들이다.조선왕조에서 비운의 왕세자로 회자되는 인물인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 사도세자와 함께 왕세자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소현세자와 관련한 가장 큰 의혹은 바로 그의 죽음에 있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1월 4일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627년 강석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병자호란 후 정축맹약에 따라 1637년(인조 15) 2월 8일 아우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였지만,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사망하였다. 오한이 나 병을 치료 받은 지 불과 4일 만이었고,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성은 이(李), 이름은 왕이며, 시호는 소현(昭顯)이다.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仁祖, 재위 1623~1649)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한준겸(韓浚謙)의 딸인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이다. 1627년(인조 5)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愍懷嬪) 강씨와 혼인하여 경선군(慶善君) 이석철(李石鐵, 1636〜1648), 경완군(慶完君) 이석린(李石磷, 1640〜1648), 경안군(慶安君) 이석견(李石堅, 1644〜1665), 경숙군주(慶淑郡主, 1637〜1655), 경녕군주(慶寧郡主, 1642〜1682), 경순군주(慶順郡主, 1643〜1654) 등 3남 3녀를 두었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음력 정월 4일에 태어나 1625년(인조 3) 정월에 왕세자(王世子)로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원익(李元翼), 신흠(申欽)과 함께 전주(全州)에 내려가 분조(分朝)의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무군사(撫軍司)를 설치했고, 전쟁이 끝나자 강화도로 피신했던 인조를 호위해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참의(參議) 강석기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했다. 1635년(인조 13) 모친인 인열왕후가 죽어 상을 치르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세자빈과 함께 인질이 되어 청나라의 수도였던 성경[盛京, 지금의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도착한 것은 1637년 4월이었다. 심양에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리, 사역원 역관, 선전관, 의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을 합하면 총 200명에 가까웠다. 심양에서 이들은 새로 건축한 심양관소, 즉 심관(審館)에서 생활했다. 심관은 양국간의 각종 연락사무나 세폐와 공물의 조정, 포로를 중심으로 한 민간인 문제 등을 처리하는 일종의 대사관 같은 기능을 했다.심양 생활은 단조로운 고국에서의 생활과 달리 무척 다양하고 바빴다.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그 나라 고관들과 친분을 맺었다. 또 뇌물외교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과의 무역이나 둔전(屯田) 경영에 참여하여 재력을 비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 포로를 구출해 냈다. 부인인 세자빈 강씨는 영리하고 사업 수완이 좋아 외교적인 문제는 소현세자가, 경제적인 문제는 세자빈 강씨가 주도하였다. 청은 중국 통일의 야망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세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조선을 담당하고 있던 용골대는 세자와 마음을 터 놓는 사이처럼 지냈다. 처음 심관 생활은 엄중한 감시와 제한 속에 보내야 했지만, 점차 청은 세자에게 각별하게 대했다. 몽고 각지의 행사에도 초대했고 정기적인 연회에도 세자 부부를 참석시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지원병과 물자요구가 있었고 이를 조선에 보고해야 하는 세자의 입장은 항상 바늘방석이었다. 1644년 마침내 청은 북경을 차지했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살했다. 더 이상 청은 조선의 왕세자를 인질로 묶어둘 이유가 없어졌고,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으면서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외교 창구 역할을 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게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지원군을 파병하겠다는 등의 약속을 하였으나, 오히려 친명배청의식이 강화되어 청나라와 자주 외교적 마찰을 빚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제의 행사와 사냥 등에 참여하며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조선인 포로의 속환문제와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지원요구 등 여러 정치·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했다. 베이징에 있을 때에는 독일의 예수회 선교사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과 교류하며 천구의와 천문서, 천주상 등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당시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주고받은 편지 내용은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해지는데, 그 편지에서 소현세자는 서학(西學)의 보급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중원을 차지한 청의 힘을 지켜 본 소현세자는 삼전도의 굴욕만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인조와 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세력은 소현세자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오랜 인질 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를 반기지 않았다.
어느덧 인조에게 소현세자 내외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귀국 전부터 소현세자가 왕이 되고자 청나라를 부추겨 부친인 인조를 심양에 오게 만드는 공작을 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인조는 청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할까 봐 불안해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냉담한 환대 속에 귀국했고, 그가 가져온 청나라 물건은 인조의 불쾌감을 가중시켰다. 인조에게 비친 소현세자 내외는 청에서 고초를 겪다 온 것이 아닌 호강을 하다 온 것처럼 보였다. 결국 소현세자는 가져온 채단(彩段) 4백 필과 황금(黃金) 19냥을 호조로 돌려 보냈다.
하지만 1645년 음력 2월 귀국한 소현세자는 그해 음력 4월 26일에 창경궁(昌慶宮)의 환경전(歡慶殿)에서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고양(高陽)의 소경원(昭慶園)에 매장되었다. 소현세자가 사망할 즈음, [조선왕조실록]에는 심상치 않은 기록이 있다. 소현세자가 학질로 진단받던 4월 23일 다음날에 화성이 적시성(積屍星)을 범하였다는 기록과 경상도 칠곡현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실록에 지진에 대한 내용은 수천 건에 이르고 있으므로 특별히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흔한 것이 아니다. 적시성은 죽음을 상징하는 재난의 별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면, 조선왕조 전 시기동안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24회 정도에 불과하다. 그 만큼 드문 천문현상이며, 불길한 징조로 해석되었다. 인조 대에 적시성과 관련한 기록은 총 4회이다. 적지 않은 기록이다. 총 4회 중에 주목되는 것은 병자호란 발발 2년 전인 1634년과 소현세자가 사망한 1645년이다.
4월 24일 세자가 침을 맞았다
4월 24일 화성이 적시성을 범하였다.
적시성을 범하는 오성(五星)은 목성과 화성이다. 이 가운데서도 화성은 목성 보다 더 불길한 것으로 해석된 듯하다. 적시성 관측 기사는 마치 조만간 있을 세자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튿날인 4월 25일 세자는 다시 침을 맞았으나,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그 다음날 26일 오시(午時)에 창경궁 환경당(歡慶堂)에서 사망했다. 급작스런 죽음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소현세자가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진원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가 염습(斂襲)에 참여하고 나와서 '시신이 온통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에서 모두 피를 흘리고 있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것 같았다'는 증언을 남겼다는 내용도 기록하고 있다(인조 23년 6월 27일).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한 것을 인조가 못마땅하게 여겼고, 인조에게 총애를 받던 소용(昭容) 조씨가 세자와 세자빈을 헐뜯어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다. 학질은 대개 모기에 의해 발병이 되는 것으로 오한과 발열이 반복되고 땀과 갈증이 심해지며 주기적인 발작 증세와 함께 심하면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병이다. 온대지역에도 말라리아가 유행하였기에 오래 전부터 한방에서도 학질에 대한 치료로 침구와 약 처방이 있어왔다. 그런데 온대지역의 말라리아는 열대형과 달리 어린이나 노약자가 아니면 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소현세자의 병명이 학질로 진단을 받은 이후 의원들은 그에 적절한 처방을 진행하고 있었다. 침과 함께 소시호탕과 같은 탕약이 처방되었다. 그러나 세자의 증상은 급격히 나빠져 갔다.
소현세자가 병에 걸렸을 때 담당 의원은 이형익이라는 자였다. 이형익은 3개월 전에 의관으로 특별 채용된 자로 소현세자 내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애첩 조소용의 친정에 출입하던 자였다. 인조실록의 편찬자가 소현세자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조소용이 세자 내외를 평소 인조에게 무함했던 일을 함께 거론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돌연사에 가까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인조의 태도는 더 의아했다. 대신들이 의원 이형익을 국문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간청했으나, 인조는 그런 일은 다반사므로 굳이 처벌할 필요 없다고 했다. 게다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마저 거의 박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했으며, 그 예법마저도 세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왕세자로서 국가 경영을 고민하고 탁월한 외교 감각을 지녔던 소현세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조선 역사는 달라졌을까. 소현세자의 죽음은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점이 많다. 소현세자의 불행은 그가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은 세손인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에게는 불행을 의미했다. 왕위계승자가 제대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면 그 끝은 죽음과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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