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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야사이야기

임금의 부의금은 왜 이리 많았을까

by 무님 2020.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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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 중의 하나는 친척이나 지인들의 경조사에 내야 하는 축의금이나 부의금이 아닐까? 이번에는 과연 얼마를 내야 할까가 그야말로 큰 고민거리다. 조선 시대에도 임금들은 종친이나 재상 등의 고위직을 역임한 신하들이 사망하면 부의금을 하사하였다. 부의금만이 아니라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주고 시호를 내리기도 하였다.

태종 5년 12월에 제정된 예장식이라는 법규를 보자.

종1품 이사의 대신이 죽으면 예장하고 시호를 주며, 정2품 관원은 시호로 주고 부의를 보낸다. 종2품 관원은 다만 부의만 을 준다. 검교정승은 예장을 행하게 한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예장은 국왕이나 왕비 등에 대한 국장에 버금가는 장례 의식으로, 나라에서 일체의 장례 비용, 물자, 인부 등을 공급하여 장례를 치러 주었다. 검교란 해당하는 벼슬의 정원 외에 임시호 증원하거나 실제 사무를 보지 않고 이름만 가지고 있게 할 때 그 벼슬 이름 앞에 붙여 이르더 말이다.

2품 이하의 고관이다. 종친 등은 비록 예장은 행하지 않더라도 부의나 시호 이외에 장례에 필요한 관이나 석회, 종이 등을 내려 주도록 하였다. 또한 철조라고 하여 고관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3일 내지 5일 동안 대궐에서 행하는 조회를 중지토록 하였다. 그러면 임금님의 부의금은 과연 얼마였을까? 요즈음에도 주로 돈으로 부의금을 내지만, 조선 초기의 임금들은 쌀과 통을 섞어서 주었다. 관원을 기중으로 1품은 쌀과 통을 아우른 미두 60~100석, 정2품은 40~50석, 종2품은 30석 이하를 주게 되어 있었다. 미두 1석을 2가마로 치고 1가마를 80kg으로 환산하면 100석은 약 200가마로 1600kg이다. 당시 재상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부의금을 하사 받았던 것이다.

이 정도면 지금도 상당히 많은 양인데, 재정 형편이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당시에는 더욱 부담스러운 양이었음에 틀림었다. 재상 등에게 하사한 임금님의 지나친 부의금 때문에 나라 형편이 어려워질 정도였다. 아마도 나라의 허리가 휠 정도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많은 부의금을 하사한 것을 보면 혹시 부의금을 일종의 퇴직금으로 여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되자 태종 14년 6월부터는 부의금을 줄이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호조에서 흉년이나 전쟁에 대비하여 부의금을 줄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만약 흉년의 재앙이 있거나 전쟁이 일어나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부의금을 각각 10석씩을 감하도록 하십시오."

임금이 윤허함에 따라 이수 관원에게 주는 부의금이 각각10석씩 감소하게 되었다. 그만큼 부의금은 위급 상황에 써야 할 재원을 위협할 정도로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그 날의 기록 <조성왕조실록>

 

태종 8년 10월에 인천 앞바다의 덕적도에서 숯 굽는 나무를 싣고 오다가 익사한 선군 69명의 집에 부의를 내려 주었다. 

 

그 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심지어 환관의 어머니와 궁녀에게도 부의금을 주었다. 태종 12년 1월 환관 노희봉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임금이 들었다.  "이 사람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게으름이 없고 매우 큰 공로가 있다."

임금은 미두 30석과 종이 100권, 초10개를 내려 주었다.

 

그 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태종 11년 5월부터는 지방에 근무하다가 죽은 관리에게 지위에 관계없이 부의를 주도록 하였다. 당시 충청도 도사 김곤이 죽자 임금이 명하였다.

"지방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죽으면 비록 지위가 미미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부의를 내리도록 하라."

임금은 김곤에게 미두 20석을 내려 주었다. 

 

그 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조선 초기에 부의금은 나라의 재정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천문학적인 양이었다. 국가를 위해 애쓴 신하들을 우대한다는 정신이 지나쳐 자칫 나라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상황을 초래하였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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