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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야사이야기

조선 시대에도 인사 청문회가 있었다

by 무님 2020.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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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가 출범하면 신임각료 후보자들에 대한 인사 청문회가 열린다. 국무총리나 각 부의 장관 등은 국회의 인사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투기나 편법 증여 등의 불법적인 재산 축적, 자신과 자녀들의 부정한 군 면제, 논문표절, 부적절한 처신 등으로 청문회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하고 낙마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곤 한다. 낙마한 공직 후보자들은 남들이 다들 부러워하는 고위직에 거의 접근하였다가, 청문회라는 복병을 만나 거의 이룬 꿈을 내려놓아야 해서 아마도 땅을 치고 후회하였을 것이다.

요즘은 국회 청문회 이전에 이미 언론이 비리를 낱낱이 파헤치는 바람에 스스로 물러나는 공직자들도 많다. 언론에 의한 검증이 국회 청문회보다 무섭다고 한다. 철저한 자기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현대의 인사 청문회와 같은 제도가 있었다. 물론 지금의 인사 청문회와는 많이 다르지만, 관리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정식으로 임명되기 전에 서경이라는 일종의 청문회를 거쳐야 했다. 서경이라는 심사 과정을 통해 부적격자를 걸러 내고자 했던 것이다. 서경 과정은 현대의 인사 청문회 못지않게 까다롭고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서경을 통과하지 못하여 관직에 임명되지 못 하는 경우도 많았다.

먼저 이조 같은 인사 담당 기관에서 관원을 선발하여 오늘날의 사령장에 해당하는 고신을 작성하면, 고신과 4대 조상을 기록한 단자를 대간, 즉 사헌부와 사간원에 보낸다. 대간에서는 각각 관원 2~3명씩을 보내 야사가 합좌하여 신임 관원의 가계와 전력, 인물 됨됨이 등을 심사하는데, 전원이 찬성하면 고신에 서명했다. 부결되면 서명하지 않았다. 고래 시대에는 1~9품의 전 관원이 서경을 받아야 했지만, 조선은 초기에 5품 이하 관원만 서경을 받도록 했다.

 

 

그날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서경이 얼마나 까다로웠는지를 보여 주는 실례를 하나 소개하겠다. 태종 11년 2월 사헌부 지평 김최를 좌천시켜 재령 현령으로 임명했다. 임금이 그를 지방의 수령으로 내보낸 이유는 본관이 분명하지 않아 사헌부에서 고신에 서명하지 않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원래는 중앙의 관직으로 승진시키려고 했으나, 그의 본관이 불분명하여 서경에 통과하지 못할 것 같자 상대적으로 쉬운 수령으로 임명하였다. 서경에 걸리면 관직을 내놓아야 하니까 관직을 유지시켜 주기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지방직을 주었던 것이다. 서경이 임금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엄격한 절차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엄정한 인사 청문회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다만 한 개인의 인격을 송두리째 파괴할지도 모르는 '아니면말고'식의 무차별적인 인신공격만은 자제해야 하리라. 예수도 일찍이 없는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고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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