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용영 설치와 수원화성 건설
정조는 상당히 많은 암살 위기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러한 암살 위기는 정조에게 결국 자신을 호위할만한 군사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게 하였다. 당시 군영은 대부분 주요 당파에 장악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임금을 지키기보다는 자신의 당파를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결국 1784년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축하하기 위해 경과를 실시 무과에서 무려 2000명의 합격자를 배출시켰고 이후 홍복영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1785년 장용위를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1788년 장용위를 장용영으로 개칭하면서 정조는 하나의 자신의 친위 부대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면서 동시에 이상 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바로 수원화성의 건설이다. 이 이상 도시의 건설을 통해 당시 한양에서는 펼치지 못할 다양한 정책들을 펼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화성 건설도 장용영과 마찬가지로 기존 체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고자 했던 마음이 강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정조는 장용영의 외영을 수원화성에 설치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은 한국 건축의 발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도시계획, 조경과 그에 관련된 예술에 있어서도 몇 세기에 걸쳐 큰 영향을 끼쳤다. 화성은 극동의 군사 방호 건축물의 전형이며 군사 건축사의 역사적 표본이다. 수원 화성은 군사, 정치, 상업의 기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과 일본의 요새들과 구별된다.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그의 아버지 영조에 의해 부당하게 단죄되어 처형당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1776년, 영조의 왕위를 계승하자 그는 아버지의 유해를 풍수지리에 있어 가장 길한 장소인 화산에 이장하였다. 그는 아버지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근처에 용주사를 세우고 조정을 수원 팔달산 자락으로 옮겼다. 조정을 옮김으로써 정조는 당쟁을 끝낼 수 있었으며 왕권을 높이고 새 성 안에 있는 안전한 궁궐 내에 머물 수 있었다.
화성은 실학파의 거두 정약용(丁若鏞, 1762~1836)에 의해 설계되었다. 건축물은 전 영의정이자 형조판서였던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감독 하에 1794년~1796년 사이에 완공되었다. 『화성성역의궤』에 상세하게 묘사된 거중기, 도르래를 비롯한 다른 특수한 건축 장비들은 화성 건축을 위해 디자인되고 제작되었다.
화성 행궁과 제례를 진행하는 사직단을 포함한 다양한 건축물이 요새 주위에 건축되었다. 그러나 이 건물 중 일부는 뒤에 전쟁과 반란의 와중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오직 행궁의 부속 건물인 낙남헌만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성의 일부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지만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 화성을 원래의 정확한 형태대로 복원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거대한 성벽은 팔달산 자락를 포함하는 지역을 둘러싸고 있다. 이는 규칙적이거나 대칭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땅의 지형에 따라 건축되었다. 성벽의 둘레에는 네 개의 문, 수문들, 관측탑, 지휘소, 다연장 화살 발사탑, 화기 보루, 각진 탑, 비밀 문, 봉수 탑, 보루와 벙커 등 본래 48개의 방어 시설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온전히 남아 있다. 각각의 총안 사이의 벽(merlon)에는 세 개의 총안이 있다.
네 개의 문은 중요 지점에 설치되었다. 남쪽의 팔달문과 북쪽의 장안문은 석재를 기본으로 한 2층 목조 건물이며, 측면에 경비하는 군사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고, 불로 구운 벽돌로 지어진 반달형 V자 보루들에 의해 차폐되어 있다. 이들 문은 수원 화성을 통과하는 주된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서쪽과 동쪽의 건물은 1층짜리 건물들이며,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도 역시 V자 보루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1964년에 성의 복원과 재건축 작업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각진 탑들, 지휘소, 관측탑, 보루, 그리고 다른 방어 시설들이 모두 튼튼하게 건축되었으며 최대한의 효율과 최소한의 노출을 위해 전략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둘러싼 성벽과 문, 탑, 보루 등 기념물은 재료와 기법의 측면에서 진정성을 갖고 있다.
* 수원 화성의 배경
사도세자는 조선왕조 제21대 왕인 영조의 둘째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왕위를 계승한 후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의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화성을 축성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그 축성의 근본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 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 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 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다. 또한 수도 남쪽의 국방 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 화성은 규장각의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 만든 『성화주략(城華籌略)』(1793)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 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되었다. 축성 당시 거중기 녹로(도르래 기구) 등 건축을 위한 새로운 기계를 고안해 큰 규모의 석재를 옮기고 쌓는 데 이용하였다.
수원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 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 있다. 수원 화성은 축조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되어 없어졌으나 1975년~1979년까지 축성 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0㏊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를 갖고 있다. 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咆)루 5, 각루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으나 이 중에서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고 4개 시설물이 아직 남아있다.
수원 화성은 축성할 때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 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축성의 동기가 군사적 목적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측면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었기 때문에 성곽 자체가 ‘효’ 사상이라는 동양의 철학을 담고 있어 문화적 가치 외에도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지닌 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 화성에는 이러한 효 사상과 관련된 문화재가 잘 보존되어 있다.
축성 후 1801년에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는 축성 계획, 제도, 법식뿐 아니라 동원된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예산 및 임금 계산,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공사일지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화성이 성곽 축성 등 건축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록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수원 화성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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