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조성왕조 22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중음을 복수하는 한편 조정의 파당을 없애고 새로운 사람들을 조정에 대거 등용하여 자신의 친위세력을 형성해 나가는 한편 홍국영을 몹시 신임하여 그로 하여금 자신을 돕게 하였다.
홍국영과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홍국영은 세손을 죽음을 무릅쓰고 지켰으며, 항상 그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어느 날 세손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영조에게 세손이 <시전>의 '요아편'을 읽는다고 무고하였다. 영조가 이 책을 읽지 말도록 당부했으나 세손은 궁금하여 어느 날 몰래 펼쳐 보았다. 그 책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었다.
' 아버지가 날 낳으시고 어머니가 기르셨으니 그 깊은 은혜 갚고자 할진대 하늘이 끝이 없음과 같다.'
세손이 <시전>의 이 대목을 읽는 것을 목격하고 곧장 영조에게 달려가서 고하자 영조는 세손을 불렀다.
"세손, 너는 오늘 어떤 글을 읽었느냐?"
"예, <시전>을 일고 있었습니다."
"<시전>을 읽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읽었느냐?"
"........"
세손이 어물쩍거리자 영조는 내시에게 세손이 읽었다는 책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때 마침 홍국영이 세손을 찾아갔는데 그는 자리에 없었고 <시전>이 방에 놓여 있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곧장 <시전>의 '요아편'을 칼로 도려냈다.
영조의 심부름을 갔던 내시가 책을 가져오자 영조가 책을 살펴보니 <요아편>이 칼로 도려져 있었다.
"네가 <요아편>을 도려낸 연유는 무엇이냐?"
"예, 전하께서 읽지 말라고 하셨기에 칼로 도려냈습니다."
세손은 엉겁결에 이렇게 둘러댔다. 그러자 영조는
"음, 앞으로도 <요아편>은 읽지 말아라."
세손은 이렇게 하여 무사히 동궁으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홍국영이 벌써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저하, <요아편>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대는 나를 살렸소. 참으로 감사하오."
세손은 홍국영의 손을 덥석 잡고는 몇 번이나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홍국영은 자신이 <요아편>을 도려낸 연유를 말하자 세손은
"그대의 재치로 내가 살았소. 앞으로 그대에게 잘못이 있다고 하여도 내 반드시 용서하리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은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정조의 정적들을 없애는 데 앞장섰으며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혼자 도맡아 처리하였다.
이때 홍상범이 자객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반역을 꾀하기 위해 무사들을 모았는데 이때 호위군관 강용휘를 꾀어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마침내 강용휘는 전홍문을 포섭하였고, 그들은 홍상법의 친척인 홍대섭의 집에 자주 모여 모의하였다.
홍상범은 여러 사람들을 포섭하자 거사 날짜를 정하고 강용휘는 고들개철편을 품속에 지니고, 전홍문은 칼을 숨겨가지고 대궐에 들어가 만나는 사람들을 죽이기로 모의하고 자신은 20여 명을 거느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 행동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강용휘와 전홍문은 약속한 날에 대궐에 들어가 강계창과 나인 강월혜의 주선으로 존현각에 이르었으나 이때 그들의 음모가 드러나 군사들에 의해 쫓겼다. 그들은 대궐에서 빠져나와 다시 모의하다가 군사들에 의해 모두 잡혔다.
그 뒤 홍계능은 정조를 살해하고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었다.
홍국영은 정조를 반대하는 세력들을 조정에서 쫓아냈다, 왕대비 정순왕후의 동생인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시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원빈에 책봉되게 하였다.
정조 3년인 1779년 5월 홍국영의 여동생인 원빈이 갑자기 죽었다. 이때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가 독살되었다고 하면서 중궁전의 나인들을 혹독하게 다스리자 비난이 일었다.
정조는 홍국영에 대한 비난이 일어나자 그를 조정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때 그는 32살이었고, 한창 세도를 누리다가 허무하게 쫓겨났다.
정조실록 7권, 정조 3년 5월 24일 정미 1번째 기사1779년 청 건륭(乾隆) 44년
도승지 홍국영을 체직시키고 유언호를 도승지에 제수하다
도승지 홍국영(洪國榮)이 상소하기를,
"신이 복이 적은데도 벼슬이 갑자기 올라갔고 문벌(門閥)이 한미한데도 지위가 높아졌는데 사람이 시기하고 귀신이 꺼리는 화(禍)가 결국에는 신에게 닥치지 않고 우리 인숙 원빈(仁淑元嬪)에게 닥쳤습니다. 성회(聖懷)가 이로 하여 너무도 슬퍼하고 계시니 국가의 대계(大計)를 위하여 아득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의 부모(父母)의 사소한 정경(情境) 같은 것을 가지고 감히 우러러 상청(上聽)을 번거롭혀 성회(聖懷)를 흔들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만, 신의 참혹하고 원통스러운 사사로운 마음은 실로 사람으로서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정리(情理)에 있어서는 진실로 오늘 즉시 병부를 반납하고 병든 어버이를 부축하여 모시고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을 마치도록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그러나, 아! 지금 이후로 성상(聖上)의 옛날 외롭고 위태로웠던 상황이 더욱 다시 위태롭고 외롭게 되었으니, 숙위(宿衞)에서의 한 걸음은 곧 신의 생사(生死)가 걸려 있는 곳인 바, 어떻게 감히 사사로운 생각에 의거하여 그 사이에 계교(計較)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이 은대(銀臺)139) 의 장석(長席)에 있은 지가 이제 이미 4년이 되었습니다. 본원(本院)의 고사(古事)에 매일 도승지 신모(臣某) 좌기(坐起)하고 첫 머리에 쓴 것이 가장 길었던 경우가 10여 개월에 불과했는데, 신이 앉아서 있을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그 가운데 끼지 않았고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곧바로 신의 성명(姓名)을 쓴 것이 모두 얼마의 세월이었습니까? 신이 이 변고(變故)가 있기 전에 등에 땀을 흘리면서 마음이 떨리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은 대개 관직의 체역(遞易)은 바로 한 사람만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변고가 있은 뒤에 이르러 조용히 생각하여 보니 3백 년 동안 은대를 설치한 이후 결단코 이러한 전례는 없었습니다. 천리(天理)에는 영탈(盈敓)이 있고 인사(人事)에는 추천(推遷)이 있는 법인데 만일 영탈과 추천이 없다면 그 걱정이 또 의당 어떠하겠습니까? 말하는 사람은 혹 ‘신이 이 직임을 맡지 않으면 대전 안의 중요한 사무를 관리할 수 없다.’고 합니다만, 신의 숙위 대장(宿衞大將) 직임은 바로 성상(聖上)께서 옛것을 모방하여 지금에 새로 만든 법제이니, 자신이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국사에 참여하여 논할 수 있는 것은 진실로 아무런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혹 말하기를, ‘신이 약원(藥院)의 직임을 맡지 않으면 기거(起居)의 일을 받들어 보살필 수 없다.’고 합니다만, 이제 신은 척완(戚畹) 가운데 한 신하에 불과하므로 평상시 사사로이 만나뵙는 방도는 또한 진실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찬선(饌膳)을 맛보는 책임은 제조(提調) 신(臣) 구윤옥(具允鈺)이 있어 주야로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정성을 다하여 힘쓰고 있으니, 신은 이제야 일할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비답을 내려 체직을 허락하고나서 특별히 유언호(兪彦鎬)를 도승지에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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