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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님의 여행 이야기

조선 중기의 문신 대동법을 시행한 < 오리 이원익 생가, 충현박물관>

by 무님 2020.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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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무님의 여행이야기> 충현박물관을 소개합니다.

충현박물관은  오리 이원익의 생가터에 자리하고 있다. 오리 이원인 선생은 이원익(, 1547∼1634)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신의 한 사람이다. 그의 생몰년은 그를 규정하는 대표적 특징을 알려준다. 그는 87세로 매우 장수했고, 그런 까닭에 임진왜란(45세, 이조판서)과 인조반정(76세, 영의정), 정묘호란(80세, 영중 추부사) 같은 조선 중기의 중요한 사건을 모두 통과했다. 나이와 관직이 보여주듯이 그는 그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다.

어떤 사람의 지위와 임무가 높고 중요할수록 그의 일상은 평온보다는 변화와 격동에 지배되기 쉽다.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그것은 그에게 행복이기도 하고 고통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 중기는 뛰어난 인물들이 특히 많이 배출된 시기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조건은 특히 가혹했다. 이원익은 뛰어난 실무적 경륜과 굳은 의지로 그런 국면을 헤쳐간 중요한 인물이었다.

 

관감정

 

 

오리 이원익 선생은 명조 2년에서 인조 12년까지 4대의 왕을 섬긴 관리로써 조선의 가장 힘든 시기인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서 뛰어난 실무 능력과 강직한 원칙으로 나라를 지틴 인물이기도 하다. 이원익 선생은 성품이 소박하고 소임에 충실하며 정의감도 충실히야 다섯 차례의 영의정을 지내셨으나 그의 집은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다고 한다. 퇴근 후에도 조석 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하였다고 하여 청백리 이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원익 생가에 들어서면 안으로는 충현관과 관감당, 종택이 보인다. <관감당>은 1630년(인조 8) 인조(仁祖)가 경기 감사에게 명하여 이원익에게 지어준 집이다. 편액의 의미는 인조가 신하와 백성들에게 이원익의 청렴하고 간결한 생활 자세를 “보고 느끼게 하고자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편액은 어느 때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건립 경위에 대하여 1694년(숙종 20) 이만성(李萬成)이 정리한 〈사제시상교(賜第時上敎)〉라는 편액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30년 정월 인조가 승지 강홍중(姜弘重)을 보내 이원익을 문안하였다. 이에 ‘두 칸 초가에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라고 복명하였다. 인조는 “재상이 된 지 40년이나 되었는데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청렴하고 결백하며 가난에 만족하는 것은 고금에 없는 일이다. 내가 평생에 존경하고 사모하는 것은 그의 공로와 덕행뿐이 아니다. 이 공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으로 본받을 바이니, 어찌 백성이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겠는가?”라고 말하고 집을 지어주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이원익 선생은 이곳에서 4년간 기거하다가 서거하였다. 이때 지어진 정당(正堂)은 1637년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서거 60주년인 1694년에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다시 어느 시기에 허물어졌다가 1916년 10대손 이연철(李淵哲)에 의해 다시 중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원익 영우는 <오리영우>는 오리 이원익 선생의 영정을 모신 집이라는 뜻으로 그를 추모하는 사당이다. 일반적으로 다른 종가의 사당의 경우는 위패를 모시고 있으므로 ‘○○사'라고 불리지만 이곳은 내부에 감실을 따로 두고 영정을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므로 ‘영우'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오리영우>는 이름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원익 선생을 제사 지내는 일종의 ‘불천위(不遷位)' 사당에 해당한다. 그런데 종가에는 이원익 이외에 그의 후손을 제사 지내는 별도의 사당이 있어야 한다. 13대손 종손 이승규 박사에 따르면 오리 영우 아래 모과나무 자리에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생각건대, 오리 영우가 남향을 하고 있고, 앞쪽으로 관감당이 있기 때문에 그의 후손을 위한 사당은 불가피하게 동향을 하도록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 현판은 근곡(芹翁) 이관징(李觀徵, 1618~1695)이 썼다. 현판의 내용은 “1693년(숙종 19) 10월 이원익 선생이 말년에 현 광명시 소하동으로 물러나와 사실 때 인조가 하사한 집인 관감당 옛터에 이 사우를 건립한다.”라는 뜻이다. 관감당은 1630년(인조 8) 인조가 이원익에게 하사한 집으로 이원익이 말년에 4년 동안을 기거한 곳이다. 그러나 1647년 병자호란으로 소실된 후 건립되지 못하다가 이원익 서거 60주년을 기념하여 1694년(숙종 20)에 중건되면서 오리 영우도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원익 선생의 종택은 여느 조선시대 양반가와 다르게 소박하나 초라하지 않게 지어져 있다. 넓지 않은 마당과 높지 않은 기와지붕,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하여 지은 집은 서로의 얼굴을 맏재어 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만시 <도망>

 

 

<충현관>은 전시실은 1층과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은 영정과 친필 등 이원익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1층에는 종가에서 사용했던 제기와 민속생활품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다. 400여 년 전의 유물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대부 집안의 각종 자료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를 관람하던 중 이원익 선생이 아내 영일정씨의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를 보았다. 이 시는 만장에 쓴 것으로 장사를 지낸 후 내용은 베껴 보관하고 태우는 것이 관례이나 이원익 선생이 쓴 것이라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관되었다고 한다. 만시의 제목은 <도망>으로 한 구절 남겨 본다. 

" 널 어루만지며 그대를 떠나 보내니 그대 할 일 다 마친 것 부럽소. 그대 따라갈 것 몹시 원하지. 세상에 오래 사는 것 원치 않으니 황천에서 혹시나 서로 다르게 되면 업보의 인연 응당 이전과 같으리"

유독 이 글이 눈에 띄었던 건 아내를 사랑하는 선생의 마음과 고된 시기를 넘긴 선생의 힘들었던 상황이 마음으로 느껴져서가 아닐까 한다. 

 

이원익 생가를 둘러보며  볼 수 없는 곳이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종가의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생가는 많은 곳을 볼 수는 없지만 보이는 자리마다 정성과 애정이 묻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못내 아쉬운 것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주고 관심을 가지지 못함이었다. 역사의 큰 한 줄을 맡았던 선생의 흔적들이 오래 남아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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