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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님의 여행 이야기

겹벚꽃이 예쁜 순천 < 선암사 >

by 무님 2020.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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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는 순천의 조계산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삼국시대 신라 시기의 사찰이다. 2009년 12월에 사적 제507호로 지정되었으며,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선암사

 

 

선암사는 542년(진흥왕 3)에 아도화상()이 처음으로 개창하여 비로암()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이것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875년(헌강왕 1)에 도선()이 창건하여 선암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더 신빙성이 있다.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용암사중창기(靈鳳山龍巖寺重創記)」에 지리산 성모천왕()이 “만일 세개의 암사()를 창건하면 삼한이 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라고 한 말을 따라 도선이 세 암자를 창건하였는데, 곧 선암()·운암()·용암()이 그것이라고 했다.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 장()되는 면이 평평한 큰 돌이 있는데 사람들은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하며, 이 때문에 선암이라는 절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1088년(선종 5) 의천()이 중창하였으며 선암사에 의천의 영정이 있는 까닭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석종()·철불()·보탑()·부도()·문수전(殿)·조계문()·청치() 등은 다행히 화를 면하고 나머지 건물은 모두 병화에 소실되었다. 정유재란에 불타기 이전의 선암사에는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

법당을 중심으로 하여 그 동쪽에 명부전(殿)·약사전(殿)·적연당()·명경당()·대장전(殿)·청운당()·백운당()·배면당()·독락당() 등이 있었고, 그 서쪽에는 미타전(彌陀殿)·무집당(霧集堂)·영풍루(迎風樓)·천장전(天藏殿)·지장전(地藏殿)·문수전·보현전(普賢殿)·용화당(龍華堂)·만월당(滿月堂)·반선각(伴仙閣)·제운료(際雲寮)·낙성료(落星寮)·서하당(栖霞堂)·성행당(省行堂)·탕자방(湯子房)·청치 등이 있었다.

그 앞으로는 정문·종각·대루(大樓)·조계문 등이, 그리고 그 뒤쪽에는 첨성각(瞻星閣)·국사전(國師殿)·오십전(五十殿)·응진당(應眞堂)·팔상전(八相殿)·원통전(圓通殿)·능인전(能仁殿)·원명각(圓明閣)·성적당(惺寂堂)·진의각(眞疑閣)·활연당(豁然堂)·적조당(寂照堂)·심주각(尋珠閣)·완월당(玩月堂) 등이 있었다. 1660년(현종 1)에 경준(敬俊)·경잠(敬岑)·문정(文正) 등 세 대덕이 중건하였고, 그 뒤에 침굉()이 많은 당우()들을 보수하였다.

특히 침굉은 선암사에서의 규범을 엄하게 하였다. 해마다 제석()이면 승려들이 동서로 패를 나누어 술을 마시며 노는 일이 있었는데, 이를 금하고 염불로써 밤을 새우도록 승려들의 금계()를 엄하게 하였던 것이다. 침굉의 문인에는 호암()과 치현()이 있었다. 특히 호암은 『법화경』을 염송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았으며, 사찰의 중수에 부지런하였다. 1699년(숙종 25)을 전후한 시기에 원통각(圓通閣)·약선궁(若仙宮)·대법당·오십전 등을 새로이 건설하고, 관음상 1구, 소상() 61구, 화상() 등을 새로이 조성하였다.

1704년에는 호연()이 『선암사사적()』을 썼다. 1819년(순조 19) 봄에 불이 나자 곧 상월()이 중건하였고, 1823년에 또 다시 불이 나자 그 이듬해에 해붕()·눌암()·월파()가 대규모의 중수불사를 이룩하였다.

 

선암사는 대중교통으로 가기는 어려운 곳이다. 필자도 자가용을 이용하여 갔었다. 선암사 주창장까지 가는 길도 산속으로 꽤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주차장에 내리면  선암사로 오르는 길도 꽤 깊은 산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렇다고 걱정을 할 것 없다. 옆으로 계곡도 보이고 푸르는 나뭇길이 걷기에 좋다. 무엇보다 선암사로 들어가는 돌을 쌓아 만든 다리는 일품이다. 이 절에 오는 누군라도 사진 하나 남기고픈 마음이 들만한 곳이다.

 

 

선암사 배치도

 

선암사는 천년고찰이라는 말을 증명하 듯 많은 절집을 가지고 있다. 높은 단층맞배기와를 가진 일주문을 지나면 <범종루>가 보이고 그 옆으로는 박물관이 있다. 선암사의 절집은 필자가 보아 온 오래된 절집들의 단아한 모습보다는 웅장하고 권위적인 느낌의 절집을 가지고 있다. 범종루를 지나 만나게 되는 <만세루>는 강당으로 사용하는 건물로 많은 학승들이 강학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만세루를 지난 마당에는 돌탑 2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뒤편으로  대웅전이 있다. <대웅전>은 일주문과 범종을 잇는 중심축에 위치에 있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고 후불탱화에는 영산회상도를 모시고 있다.

대웅전 뒤로 발걸음을 옮기면 그 곳엔 많은 절집이 있다. 특히 다른 절에서 볼 수 없었던 경전을 모셔놓은 장경전이 있다. 절에 경전을 모셔놓을 만큼 규모가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거다. 선암사의 다른 절집도 일일이 소개해 볼까 하다가 필자는 그만 두기로 했다. 오래된 절집의 곳곳에 많은 전각들은 그곳에 모신 신이나 그 의미도 중요하겠지만 필자가 바라본 선암사는 보는 것만으로 다른 말이 필요치 않게 느껴졌다. 전체의 절을 보아도 하나하나의 절집을 보아도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암사의 절집의 서로 연결하고 있는 마당길과 흙벽 길마저도 고아한 아름다움을 풍기며 웅장하고 기품 넘치는 절집과 그 배경이 되어주는 풍경은 그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기나 겸손하게 자리하고 있다.

 

또한 선암사에는 오랜 시간을 자리하고 있었던 만큼 많은 보물과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데 걷다 만난 모든 것이 그렇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까 싶다.

대암각동종

이 범종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서 몸통에 순치(順治) 14년명의 절대연대가 있어 1657년(효종 8)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전남 도내에서 17세기 이전에 주조된 범종으로는 대흥사 탑산사종(1233년경)을 비롯하여 태안사 만력 9년명종(1581년), 담양 용흥사 순치 원년명(順治元年銘)종(1644년), 여수 흥국사종(1665년), 진도 쌍계사 강희 25년명종(1686년), 구례 화엄사 강희 30년명종(1691년), 고흥 능가사 강희 37년명종(1698년) 등이 있다. 선암사 동종[순치 14년명]은 전남에서는 네 번째로 빠른 시기이다.

하대는 연당초문을 새겨 장엄을 더했으며 몸통 하단에 당좌 없이 위패형(총고 16.5cm)의 방형을 구획하고 그 안에 <王妃殿下 壽齊年, 主上殿下 壽萬歲, 世子邸下 壽千秋>를 새겼다. 좌우로는 <全南道寶城郡地天鳳山大原寺浮屠庵中鍾二百斤順治十四年丁酉五月日鑄造匠金龍出張士詳…>이라는 종의 주조 기록과 시주자 등이 보인다. 이 기록에 따르면 보성 대원사 부도암에서 제작되었고 이 종을 만든 장인은 김용출과 장사상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리함은 1986년 동탑 해체 때에 1층 탑신 사리공 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금동의 팔각 대좌․수정제 팔각 뚜껑․탑신이 달린 금동의 전각형(殿閣形) 뚜껑 등 3등분으로 나누어진다. 대좌 상면의 중앙에 원추형의 기둥이 있는데 상면을 반구형으로 파서 사리를 봉안하게 하였다. 전각형 뚜껑에 달린 탑신의 8면에 화문이 가득하고, 3단 8각의 지붕에 용마루와 기와골이 뚜렷하다. 이 사리기는 분청사기덤벙문호 안에 있었으며, 대좌의 다리 형식이나 지붕의 층단 형식 등으로 보아 1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외에도 유형문화재, 무형문화재, 명승지, 사적지, 기념물들 많은 것들을 보유하고 있다.

 

선암사 유형문화재

 

필자에게 선암사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겸손>이 아닐까 한다. 절집의 하나하나가 아름답고 그 존재가 빛이나고 절집의 길들은 편안히 돌아볼 수 있도록 따뜻함이 묻어 있고 석탑 하나 나무 하나 깊은 산속임에도 외롭지 않게 앉아 있고 이 모든 것이 너무 잘 어우러져 있으나 그 모습을 내세우지 않고 오는 사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또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나 자랑하지 않고 소중히 아끼며 사랑하는 것으로 지켜나가고 있는 모습은 이 절의 겸손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필자는 벚꽃 피는 봄 다시 선암사를 찾아와 이 절집의 화려한 계절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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