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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님의 여행 이야기

안동 하회 마을을 거닐다

by 무님 2020.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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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 마을은 하회마을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 성마을이며, 와가와 초가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된 곳이다. 특 히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류운룡 선생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 성룡 형제가 자라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고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 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해당하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327m의 화산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 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가 있는 지역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삼신당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들의 집들이 정남 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 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 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 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하회마을은 2010년 7월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개최된 제34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우리나라의 열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2010. 7. 31) 되었다.
유네스코는 등재 결의안에서 ‘한국의 역사마을 : 하회·양동’은 주거 건축물과 정자(亭子), 정사(精舍), 서원(書院) 등 전통 건축물들의 조화 와 그 배치 방법 및 전통적 주거문화가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와 독특 한 유교적 양반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이 오랜 세월 동안 온전하게 지속되고 있는 점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문집, 예술작품과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학술 및 문화적 성과물과 공동체 놀이, 세시풍속 및 전통 관혼상제 등 주민 들의 생활과 신앙에 관계된 무형유산이 세대를 이어 전승되고 있는 점 도 높이 평가하였다. 하회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는 한국인의 전통적인 삶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살아있 는 유산(Living Heritage)으로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온 한국인 들의 삶 자체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안동 하회마을

 

화천서원은 부용대 동쪽기슭에 있으며,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諡號 文敬公 1539-1601년) 선생의 학덕(學德)을 흠모한 유림(儒林)들이, 정조10년(1786년) 9월에 경덕사(景德祠)를 세워 선생을 봉안하였고, 그 18년 뒤인 순조 3년(1803년)에 동리(東籬) 김윤안(金允安) 선생과 종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선생을 종향(從享)했는데, 두 분 모두는 사승 관계에 있다. 이후 100여 년 동안 춘추로 향사해오다 고종 5년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강당과 주소만 남았다.

그 후, 서원의 훼철을 아쉬워하던 후손들이 1966년부터 기금을 모아 여러 건물을 복원 1996년 서원을 완성하고 복설고유를 올렸다. 경내에는 사당 경덕사, 강당 숭교당(崇敎堂), 동재(東齋-尊賢齋)와 서재(西齋-興學齋), 문루 지산루(地山樓), 원문 유도문(由道門), 주소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원지정사는 서애 선생이 선조 9년 (1576년)에 잠시 조정에서 물러나 있을 때 만송정이 한 눈에 들어오는 마을 북쪽에 짓고 학문을 했던 곳으로 은퇴한 후에는 정양하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원지(遠志)는 한약재로 심기(心氣)를 다스려 정신의 혼탁과 번민을 풀어주는 소초(小草)를 말하는데, 하회마을의 안산이기도 한 원지산(遠志山)에서 자생하는 풀이다.
따라서 원지라는 당호와 북향하고 있는 두 건물을 생각하면 북녘에 있는 임금님을 사모하는 선비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만송정숲은 2006년 11월 27일 천연기념물 제473호로 지정되었다.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마을 122호)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는 소나무숲이다.
조선 선조 때 서애(西厓)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1983년에 세운 만송정비(萬松亭碑)에는 이 솔숲의 내력과 함께, 현재의 숲이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 이 소나무들의 크기는 나무높이 16~18m·가슴높이 줄기지름 30~70㎝ 정도이다. 이 숲은 여름에는 홍수 때 수해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세찬 북서풍을 막아주며,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 혹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보호면적은 47만 6,430㎡이다.

하동고택은 하회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하동고택(河東古宅)」이라 부른다. 지금의 예천군 용궁 현감을 지낸 류교목(柳敎睦)공이 조선 헌종2년(1836년)에 세웠고, 1953년 현재 소유자의 부친이 인수하였다. 전체 24칸의 활궁(弓)자형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채로 이어져 있는 민도리 집이다.

양진당은 우뚝 솟은 솟을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선생과 서애 류성룡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 부르며,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채는 고려 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조선 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공존하는 고택이다.

충효당은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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