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4대 왕 선조 시대에는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특히 왜의 침입인 임진왜란은 내외적으로 혼란하고 전쟁에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더욱 치열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잠시 휴정에 들어가지만 일본 다시 침략해 온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정유년에 일어난 왜의 침입일하여 정유재란이라 한다.
1597년 화의 결렬로 일본의 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렸다. 먼저 가토·고니시·소 등을 장수로 한 1만 4500명의 군사를 선봉으로 정월 15일 조선을 침략하였다. 가토는 울산·죽도의 구루(舊壘)를 수축하고 부산의 수병(戍兵)을 합하여 잠시 기장에 주둔했다가 이어 양산을 거쳐 울산 서생포에 들어가 둔진하였다.
고니시는 앞서 지난해 말에 두모포(豆毛浦)로 상륙하여
2월에 부산의 원영(原營)을 수복하고 영주할 계획을 서둘렀다. 이때 조선에서는 한산도를 통제영(統制營)으로 삼아 남해안을 지켜오던 이순신이 무고로 하옥되고, 그를 대신하여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의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었다.
3월 중순부터는 일본의 대군이 속속 바다를 건너왔다. 대부분 구로다·모리[毛利秀元]·시마즈·나베시마[鍋島直茂]·하시수가[蜂須賀家政]·우키다·고바야가와·아사노[淺野長慶] 등 임진왜란 당시에 침입해왔던 제장들로서 총병력 14만 1500명이었다. 이밖에 수군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도토·와키사카·가토[加藤嘉明] 등이 지휘하였다. 일본군은 먼저 동래·기장·울산 등 각지를 점거하고, 웅천·김해·진주·사천·곤양 등지를 왕래하였다.
명나라에서는 병부상서 형개(邢玠)를 총독, 첨지도어사 양호(楊鎬)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 총병관 마귀(麻貴)를 제독으로 삼아 재차 원병을 보냈다. 명군은 압록강을 건너 양호는 평양에 머무르고, 마귀가 먼저 서울에 들어와 6월에 제장을 나누어 부총병 양원은 남원, 유격 모국기(茅國器)는 성주, 유격 진우충(陳愚衷)은 전주, 부총병 오유충(吳惟忠)은 충주를 각각 기지로 삼게했다.
조선은 체찰사 이원익,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이덕형·김수 등으로 흥복군(興復軍)을 두어 8도에 모병하였다. 또 명군의 계획에 따라 장관(將官)을 분파하여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 방어사 권응수를 경주에 주둔시켜 조령로(鳥嶺路)를 막고, 우병사 김응서는 의령에 주둔하게 하여 부산로(釜山路)를 막으며, 그밖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 등은 모두 양원을 따라 남원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해 4월 일본 수군은 조선 근해로 들어왔다. 조선 수군이 이를 중도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태풍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제로 물러났고, 일본 수군은 겨우 부산으로 입항하였다.
그 뒤 통제사 원균은 미숙한 전술과 무지한 싸움으로 일본 수륙군의 전략에 말려 패사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 배흥립(裵興立) 등도 전사하니 이순신이 쌓아놓은 한산도의 수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되었다.
도요토미는 거제 해전의 소식을 듣고, 울산 죽도성에서 부장(部將) 회의를 열어 육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석권할 것과 수군은 전라 해안을 침범할 계획을 세우게 하였다.
이에 7월 28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여 우키다를 대장으로 한 1대(隊) 5만 병력이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수륙으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모리를 대장으로 한 1대 역시 5만의 군사로 초계·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고, 그 일부는 모국기의 본거인 성주로 우회하여 역시 안의·전주 방면으로 향하였다.
당시 조명 연합군이 전력을 기울인 곳은 남원이었다. 남원으로 향한 일본군은 8월 14일부터 포위 공격을 개시하였다. 격전 끝에 마침내 16일에 남원이 함락되어, 병사 이복남 등 많은 전사자를 내고 명나라의 부총병 양원은 50기(騎)로서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그리고 2,000 병력으로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의 유격 진우충도 따라서 성을 버리고 패주하여 일본군은 전주를 무혈 점령하였다.
한편, 전주로 향하던 모리의 군은 8월 안음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던 안음현감 곽준등의 치열한 반격을 받았다. 그러나 산성은 하루 만에 함락되고 모리 휘하의 가토군은 전주로 들어가 우키다 휘하의 고니시군과 합류하였다
이에 서울에서는 도성민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조신 가운데는 왕의 피란을 주장하는 건의까지 나오게되었다. 그리하여 남쪽에서 퇴각한 명군이 한강에서 서울을 지켰으며, 경리 양호는 평양에서 급히 서울로 와서 일본군의 북침 저지를 지휘하게 되었다.전주에서 합류한 일본군 가운데 모리·가토군은 전주·공주를 거쳐 전의·진천에 이르고, 다시 그 일부인 구로다군은 직산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양호는 부총병 해생(解生)·우백영(牛白英) 등을 남쪽으로 나가게 했는데,
마침 9월 5일 여명에 직산 북방 소사평(素沙坪)에서 구로다군과 충돌하여 크게 싸워 일본군의 북상을 완전히 차단시켰다.또 원균이 패사한 뒤 다시 통제사로 기용된 이순신이 소사평의 대첩이 있은 지 10일이
지난 9월 16일 명량(鳴梁)에서 대첩을 하여 일본군의 서진(西進)도 봉쇄하였다. 진로를 봉쇄당한 일본군은 겨울이 닥쳐온다는 이유로 10월부터 남해안으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0수만의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800리에 성을 쌓고 나누어 주둔하였다. 울산에는 가토와 나베시마군이, 양산에는 우키다와 모리군이, 사천에는 시마즈군이, 남해에는 다치바나[立花宗茂] 등의 군이, 순천에는 고니시군이 각각 주둔하였다.
이 때 명군은 남원 함락 이후 적극 전세를 펴서 수륙 원병이 다수 내도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 또한 지난해 명량대첩 이후 본영 우수영이 황폐하여 각지로 왕복하던 중
1598년 2월 고금도로 진을 옮겨 전투를 하면서, 장기 작전으로 병영을 세우고 난민을 이주시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수개월만에 민가가 수만 호에 이르게 되어 한산도 당시를 능가하였다.
이 해 7월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의 수군 5,000이 고금도에 합세하였다. 그러자 명군은 한때 그 위세를 믿고 방자하여 사단(事端)을 자주 일으켰다. 그러나 이순신이 강온으로 잘 대처하여 명군의 군기를 감독하는 권한을 얻고, 조명 수군의 총지휘권도 실질상으로 양보받기에 이르렀다.이 때 양호가 파직되고 그의 자리에 천진순무(天津巡撫) 만세덕(萬世德)이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명군은 일대공세를 취하기로 하고 4로(路)로 나누어 일제히 남진하기 시작하였다.
마귀는 2만 4000의 군사를 이끌고 동로(東路)를 따라 가토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평안·강원·경상좌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동일원(董一元)은 1만 3500의 군사로 중로(中路)를 따라 시마즈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경기·황해·경상우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유정(劉珽)은 1만 3600의 군사로 서로(西路)를 택하여 고니시의 군을 공격하기로 하여 충청·전라도의 방어사가 이에 분속되었다. 진린은 수군 1만 3300으로 통제사 이순신과 함께 해상을 담당하게 했으나 별다른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에 앞서 8월 18일에 도요토미가 병사하였다. 일본군은 상(喪)을 감추고 회군하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철수를 시작하여 형세는 일변하였다.
명나라 제독 유정은 9월 중순 순천의 고니시군이 철수하여 귀환한다는 보고를 받고 9월 20일부터 육상에서 이를 공략하고, 이순신과 진린은 수상에서 봉쇄하여, 퇴로를 얻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일본군과 수일간 격전을 치루었다.
그러나 그 뒤 곤경에 처한 고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유정은 10월 16일에 군사를 철수시켜 최후의 기회인 수륙 협공 작전이 수포로 돌아갔다. 진린 또한 고니시에게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 주려했으나 이순신의 설복으로 뜻을 거두었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시마즈가 병선 500여 척을 거느리고 11월 18일 야조(夜潮)를 타고 남해 노량으로 습격해 왔다. 삼경(三更)에 이순신은 분향을 하며 하늘에 맹세하고, 명군과 함께 호응하여 사경(四更)에 노량에서 적의 선대를 맞아 적함대의 절반을 분파하였다. 적은 견디지 못하여 남해 관음포(觀音浦)로 빠졌으나, 퇴로가 막혀 다시 나오는 것을 이순신이 직접 적진에 뛰어들어 독전하였다. 이 와중에 이순신은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했고, 그의 유명을 받은 조카 완(莞)이 대신 지휘하여 적함 200여 척을 분파하고 무수한 적을 무찔렀다.
이에 시마즈 등은 50여 척을 건져 탈주했고 고니시는 격전중에 묘도(猫島)로 몰래 빠져나갔으며, 유정은 순천으로, 진린은 남해로 돌아갔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죽고 일본의 국내 사정이 불안하여 적군이 급히 철수하는 줄은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7년간에 걸친 조일전쟁은 끝났다. 이때 좌의정 이덕형과 황신(黃愼) 등은 소를 올려 명군과 함께 대마도를 칠 것을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9년에 명군도 철수하였다. 1월에 유정·진린·마귀·동일원 등이 진영을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오고, 4월에는 총독 형개가 이들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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