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7년간의 왜란은 끝났으나 이 전쟁이 조선·명·일본 등 삼국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조선은 연산군 이후 문란하기 시작한 사회가 난을 계기로 완전히 붕괴되어 경제적 파탄과 관료 기구의 부패로 나타났다.전화(戰禍)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적으로 전야(田野)가 황폐화되었다. 사회적으로는 군공이나 납속으로 서얼허통(庶孽許通), 향리(鄕吏)의 동반직(東班職) 취임, 병사의 면역, 노비의 방량(放良) 등 신분상의 제약이 해이해져갔다.
문화재의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을 위시한 많은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고 약탈되었다. 역대 실록을 포함하여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한 사고(史庫)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난중의 민중의 생활은 더욱 궁핍하여 인상살식(人相殺食: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음)의 끔찍한 상황까지 연출되었다. 왜란 전에 170만 결이던 전국의 경지 면적이 54만 결로 감소된 것도 노동력의 감소에 큰 원인이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각처에서 크고 작은 반란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 가운데 1594년 송유진(宋儒眞)의 난과 1596년에 일어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가장 두드러진다.
왜란 초기 산발적인 소요는 신분 해방을 위해 일어났다고는 해도 불만을 느껴온 지배층에 대한 우발적이며 비조직적인 행동이었다. 또 이러한 행위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왜적의 세력권 안에서 발생했고 직접 왕정의 전복을 겨냥한 반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송유진·이몽학의 난은 규모나 조직 면에서 양상이 판이하였다. 주모자들은 정면으로 현 왕권을 타도하고 새 국가를 수립하여 백성을 도탄에서 구제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또한 두 반란은 왜군이 화의를 조건으로 이미 남쪽으로 철수해서 나라의 통치권이 미치는 충청도 지역이 중심이었다. 이런 점에서 임란 초기 감사나 수령들의 수탈이나 혹사에 불만을 품었던 민중이나, 왜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바라만 보다가 흩어지는 수신(帥臣)들을 증오한 농민들의 이반과는 성격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이들 두 반란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사회에 던진 충격은 대단히 컸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피지배층에게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기회가 군공이나 납속을 통하여 주어지기는 했으나 난국 타개가 목적이었으므로 그 문이 넓지는 않았다.
한편, 병제(兵制)의 재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効新書)』를 얻어서 절강 무예(浙江武藝)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였다. 1593년 8월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이후 삼수병(三手兵)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게 했으며, 지방에도 속오군(束伍軍)을 두어 교관을 파견하여 무예를 가르쳤다.무기로서는 종래의 주무기인 궁시창검(弓矢槍劍)·총통(銃筒)·완구(碗口)·화전(火箭) 외에 난중에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와 화차가 발명되었다. 또 항왜(降倭)로부터 조총 제조와 염초 자취술을 익혀 실전에 활용했으며, 불랑기(佛狼機)를 모조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 난을 통하여 국민들의 애국심이 고취되었고 자아 반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명나라의 원군 파견으로 숭명 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에 대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다.
또, 전란중에 명군에 의하여 관우(關羽) 숭배 사상이 전래되어 난 뒤 서울을 비롯한 여러 곳에 관우묘(關羽廟)가 세워지는 등 민간 신앙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도요토미가 무리한 전쟁을 오래 끌었던 관계로 국민 생활이 피폐해졌고, 침략군 중에는 기아를 못이겨 조선에 투항한 자가 많았다. 또한 일본 국내의 봉건 제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도쿠가와[德川家康]가 국내 정복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또, 조선에서 많은 백성을 포로로 끌고가서 강제로 경작에 종사시키고 노예로 매매하기도 했다. 조선인 포로 가운데, 도공(陶工)들의 도자기 제조로 일본 도자기업에 큰 발전을 보았으며, 조선 학자로부터 성리학을 배워 새로운 지도 이념을 수립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활자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고, 특히 『퇴계집』 등 중요한 전적(典籍)을 가져가서 일본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명나라는 대군을 조선에 파견하여 국력을 크게 소모시킨 탓에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만주의 여진인에게 세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명청 교체의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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