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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비겁함과 친명정책

by 무님 2020.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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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간의 전쟁이 끝나고 전 국토는 황폐해졌다. 전쟁 이후 나라를 지킨 자와 자신을 지킨 자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하지만 선조는 나라를 지키 이들을 외면했다. 당신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들에 공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경상도 지역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났지만 이들에 대한 홀대가 심했다. 결국 전쟁 이후에 의병은 오히려 몸을 숨겨야 했다.

 

또한 전쟁 당시 앞장서서 싸운 선무공신보다 선조를 따라 피난 갔던 호송공신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전쟁 승리의 모든 공을 명나라에게 돌렸다. '아버지 명나라가 있기 때문에,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면 오늘날 조선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거다. 이때부터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재조지은 -조정이 다시 세워질 수 있도록 도와준 은혜>을 강조한게 된다. 

 

" 이제 통보하기를 우리나라가 중국이 아니었다면 이들 적을 끝내 죽여 물리치지 못하였을 것이며 이들 적을 지난해에 몰아내고 섬멸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이미 멸망했을 것이다. "      <선조실록>

 

이처럼 명나라를 높이고 찬양하는 일은 조선을 지켜내지 못한 기득권 세력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는 후일 다시금 큰 전쟁을 초래하는 결과가 된다.

 

선조는 조선의 27명 왕 중에서 명필 중의 명필이었다고 한다.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가 쓴 '화정'이라는 두 글자는 아버지 선조의 필체와 매우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즉 선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영특하여 후궁의 소생이었음에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국가의 리더로서 책임감이 부족했다.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포용력이 부족했덕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조는 조선왕조 최악의 군주로 평가를 받는다.

 

선조 목릉

 

선조의 목릉이 묻혔다. 선조( 1552~1608, 재위 1567∼1608)와 원비 의인왕후() 박씨(1555~1600), 계비 인목왕후() 김씨(1584~1632) 세 사람의 무덤이다. 9개의 조선 왕릉(건원릉·현릉·목릉·휘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으로 이루어진 동구릉(, 사적 제193호)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왼쪽에 선조, 가운데에 의인왕후, 오른쪽에 인목왕후의 능이 있다.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 나지막한 담)이 둘러져 있고, 봉분 아랫부분은 12지신상과 구름 문양이 조각된 병풍석으로 감싸여 있다. 봉분 바깥쪽으로 난간석을 비롯하여 혼유석, 망주석 1쌍, 장명등, 석양()·석호() 각 2쌍, 문인석·무인석 각 1쌍, 석마() 2쌍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릉과 인목왕후릉은 비슷한 형식으로,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과 혼유석·망주석·장명등 등의 석물이 있다.

목릉의 능역은 원래 의인왕후 박씨의 왕비릉인 유릉()이었다. 목릉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태조의 능인 건원릉 서쪽에 조성되었는데 터가 좋지 않고 물이 찬다 하여 1630년(인조 8) 유릉 자리 즉 현 위치로 옮겼고, 이때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하여 목릉이라 불렀다. 1632년 인목대비의 능을 조성하여 세 개의 능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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