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즉위 후 사림의 시대가 왔다. 그러나 사림은 학문적, 정치적 입장이 달라지며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된다.
동인과 서인은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으로 인해 붕당의 시작이 도래하게 된다.
이때 동인의 우두머리가 김효원이라 할 수 있다. 동인이라 함은 사는 지역이 동쪽이여서 동인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
김효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菴),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조부는 전생서직장(典牲署 直長) 김덕유(金德裕), 부친은 영유현령(永柔縣令) 김홍우(金弘遇)이다. 모친은 윤은좌(尹殷佐)의 딸이다. 조식(曺植) ·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신진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문명이 높았고, 김안경(金安慶) · 최인기(崔仁起) · 정유성(鄭惟誠) · 김안복(金安福) 등과 교유하였다
1564년 진사가 되고, 1565년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병조좌랑 · 사간원 정언 ·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했다. 1567년 사은사(謝恩使) 윤옥(尹玉)의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후 호조 좌랑 · 병조 좌랑을 역임하였고, 이후 정언 · 이조 정랑 · 지평을 지냈다.
1572년 오건(吳健)이 이조전랑(吏曹銓郞)으로 추천하였는데 당시 이조참의로 있던 심의겸(沈義謙)이 권신(權臣)이며 영의정이였던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것을 트집삼아 거부했다. 그리하여 1573년 김우옹(金宇顒) · 민충원(閔忠元) · 허봉(許葑) · 최경창(崔慶昌) · 홍적(洪迪)과 함께 독서당(讀書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574년 지평 · 이조 좌랑 · 이조 정랑 · 부교리 · 헌납 · 장령을 거쳤다.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심충겸이 명종의 비(妃)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동생임을 들어, 전랑의 관직은 척신(戚臣)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고 이발(李潑)을 추천했다. 이에 심의겸은 "외척(外戚)이 원흉 윤원형의 문객에게 지겠느냐"하여 더욱 심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이 이조전랑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사림파의 동인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사림파의 서인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들의 대립이 심해지자 우의정 노수신(盧守愼)과 부제학 이이(李珥)가 사림의 분쟁을 우려하여 이를 완화시키고자 두 사람을 외직으로 내보내도록 상소했다. 그 후 경흥 · 부령 · 삼척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민폐의 근원인 음사(淫祠)를 철폐했으며, 이후 사간(司諫)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으나 중앙의 관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계속 지방에 머물렀다.
당쟁이 심화되면서 안악군수로 자청해서 나갔으며, 이 후 10여 년간 한직(閑職)에 머물며 당쟁에 책임을 느껴 시사(時事)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일이 없었다. 1588년 통례원 우통례가 되었으며, 1590년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부사(永興府使)로 승진하여 재직 중에 병사하였다. 이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삼척 경행서원(景行書院)에 제향되었다.
글씨는 행서에 능하였다. 필획은 조선 초기에 유행하였던 송설체와는 달리 단정하고 깔끔하며, 강직한 골기를 띠었고, 석봉체의 영향 또한 엿보인다. 문집으로는 『성암집(省菴集)』이 있다.
김효원은 1590년에 사망했으면 그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別內面)에 있다. 묘는 정계부인 초계 정씨와 합장묘이며, 묘소에는 묘표,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장대석(長臺石),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등이 있다. 봉분 앞에는 무늬가 없는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놓인 월두형(月頭形)형의 묘표가 있다. 망주석은 꽃잎이 위로 향하는 꽃모양이 조각되어 있으며 팔각형의 받침대에 놓여 있다.
묘갈은 무늬가 없는 백색의 받침돌에 화강암의 비신(碑身)과 팔작지붕 형태의 뚜껑돌을 올렸다. 1803년(순조 3)에 세워진 것으로 비문은 허목(許穆)이 글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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