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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예종실록

by 무님 2020.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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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종실록>은 조선왕조 제8대 왕 예종의 재위기간은 1468년 9월에서 1469년 11월 약 1년 3개월간의 역사를 기술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예종양도대왕실록>이며, 모두 8권 3책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 151호로 지정 되었다. <예종실록>의 말미에는 "성화 6년 경인 2년에 명령을 받아 사초를ㄹ 출고하여 7년 12월에 이르러 <세조실록>의 편찬을 끝내고, 편찬하기 시작하여 8년 임진 5월에 끝 마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종실록>은 예종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성화 6년, 즉 성종 원년인 1470년 2월에 춘추관에서 편찬하라는 왕명을 받아 성종 2년인 1471년 12월 <세조실록>의 편찬을 마친 뒤에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3년인 1472년 5월에 완성하였다. 

시호는 양도, 존호는 흠무성무의인소효, 묘호는 예종이며, 능호는 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다.

 

예종실록

 

<예종실록>의 내용은

예종의 1450년에 태어나 1469년에 죽었다. 이름은 화ㅇ, 자는 명조, 초자는 평보임여,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둘째 아들이다. 세조가 즉위한 뒤 해양대군에 책봉되었다가, 세조 3년인 1457년 9월에 그의 형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세잘 책봉되었다.

그는 세조 14년인 1468년 9월 7일 세조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날 선양을 받아 즉위하였다. 예종은 세자로 있을 때인 1446년부터 승명대리로 정치 경험이 있었고, 세조의 정치행태를 답습하였다. 그도 세조처럼 언관들에게 강경하여, 실록에 언관에 대한 좌천. 파직 등의 기사가 많다.

예종은 재위기간이 약 14개월에 불과하여 많은 업적이 없었고, 세조 대의 훈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므로 세조 대 정치의 연장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예종은 즉위 초 세조의 유명을 받을어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을 원상으로 삼아, 이들이 서무를 의결하게 하였다. 또한 세조 비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하였다. 

그 해 직전수조법을 제정하였고, 남이, 강순 등이 반역을 도모하였다하여 처형하였다.

1469년 3월에는 삼포에서 왜와의 사무역을 금지하였고, 같은 해 6월에는 각 도, 각 읍에 있는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 해 6월에 <천하도>를 완성하였고, 7월에는 <무정보감>을 편찬하였다. 9월에는 상정소제조 최항 등이 세조 대에 시작한 <경국대전>을 찬진하였으나 미진한 것을 보완하느라고 반포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천하도

 

 

 

예종 태실이야기

 

8대 임금 예종의 태실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경기전 경내에 있다. 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 지방 민속자료 제 23호로 지정된 예종대왕 태실과 비는 원래 완주군 구이면에 있던 것을 1970년 경기전으로 옮겼다.
이 태실은 예종대왕의 태를 묻은 곳으로 옆에 태실비가 함께 놓여있다. 비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용무늬를 둔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몸 앞면에는 '예종대왕 태실' 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예종 태실

 

비석 뒷면을 보면 조선 선조 11년(1578)에 처음 비를 세운 후, 156년이 지난 영조 10년(1734)에 다시 세워두었다고 기록돼 있다. 태실은 부도와 같은 형태로, 태를 넣은 항아리를 석식에 묻었다. 전체 높으 2.35m이며, 둘레255cm, 난간둘레 1,540cm, 난간주 높이 108cm이다. 사각의 두툼한 하대석 위에 항아리 모양의 몸돌을 놓고, 그 위에 평면 팔각의 두툼한 지붕 돌을 얹은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예종 태지, 태호

 

주위로는 여덟개의 각기둥을 모지게 세웠다. 그 사이마다 아래 위로 연잎을 돋을 새김한 동자주를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팔모의 난간석을 연결해서 장식과 보호를 겸한 난간을 돌렸다. 작고 아담한 크기에 형태조차 조선 초기 고승들의 부도와 흡사하다. 태실 옆에 있는 태실비는 목과 다리를 한껏 웅크린 화강암 거북받침 위에 이수와 대리석 비를 올려 놓은 모습이다. 이수의 용 조각이 자못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가봉지의 명문을 보면
(전면 : 睿宗大王 胎室, 후면 : 萬歷六年十月初日建 / 後一百五十六年甲寅八月二十六日改石)
(전면 :예종대와 태실, 후면: 만력육년십월초이일건 / 후일백오십육년갑인팔월이십육일개석)
으로, 선조 11년(1578)에 처음 비를 세운 후 156년이 지난 영조 10년(1734)에 다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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