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이순신장군 백의종군 그리고 <난중일기>

by 무님 2020. 3. 23.
728x90

임진왜란이 일어나 있는 상황에서도 붕당으로인한 조정은 혼란하기만 했다. 붕당으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과를 놓고서도 논의가 분분했다. 특히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문제가 되었는데, 조정은 원균을 충청 절도사(使)로 옮겼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대체로 원균의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이순신을 탄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나라와 강화교섭을 하던 고니시 유키나가[西] 휘하의 요시라()라는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가 다시 조선을 침략하러 바다를 건너오니 수군을 보내 이것을 막으라는 계책을 조정에 전달했고, 이를 믿은 조정은 도원수 권율을 통해 이순신에게 수군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왜군의 계략에 빠져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이순신은 출정하지 않았고, 결국 그 책임으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597년 4월 이순신은 한 달 가까이 투옥된 상태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5월 16일(음력 4월 1일)에야 풀려나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난중일기

 

4월 1일 옥문을 나선 이순신은 남문[숭례문] 밖 윤간의 종 집에서 기다리던 조카와 아들을 만나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윤자신()과 이순신()[1554~1611]이 직접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고, 영의정 유성룡이 종을, 판부사 정탁()과 판서 심희수(), 우의정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과 곽영()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했다. 이날 이순신은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어, 정으로 권하고 위로하는 술을 차마 사양하지 못하여 억지로 마셔 몹시 취했다고 일기에서 적고 있다.

4월 2일 종일 비가 내렸는데, 이순신은 어두울 무렵 성으로 들어가 영의정과 밤이 깊도록 이야기하다가 헤어져 나왔다. 그만큼 남의 눈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초계에 있는 도원수부로 가기 위해 일찍 길을 나섰고, 수원부에 도착하여 쉬다가 경기체찰사의 수하에서 심부름하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졸의 집에서 하루 밤을 보냈다.

 

4월 13일 이순신은 그리던 어머니를 만날 꿈에 부풀어 있었으나 바닷가 포구에 닿기도 전에 어머니 부고를 듣는다. 그는 『난중일기』에서 “하늘이 캄캄했다.”라고 적고 있다. 어머니를 여의고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초계 도원수부로 향해 길을 나서야 하는 심정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는 차라리 죽어서 어머니와 두 형을 뵙고 싶었을 것이다. 그 일기를 보자.

4월 16일[양력 5월 31일, 병자] 이순신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배를 끌어 중방포 앞으로 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비는 퍼붓고 맥이 다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4월 17일 서리 이수영()이 공주에서 와서 가자고 다그쳤지만, 차마 어머니의 영전을 떠나지 못하다가 19일 일찍 길을 떠나며, 그는 어머니 영전에 하직 인사를 하면서 “천지에 나 같은 사정이 어디 또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라고 울부짖었다.

당시 이순신의 원통한 심정은 임진왜란 때 늘 옆에서 지켜본 조카 이분()이 지은 ‘행록()’에 잘 나타나 있다. 이순신은 “나라에 충성을 다하려다가 이미 죄가 여기에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였으나 어버이 또한 돌아가셨구나.”라고 대성통곡하면서 길을 나섰다고 한다.

어머니 장례도 못 치르고 떠났으니 꿈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5월 6일 이순신의 꿈에 나타난 두 형이 서로 붙들고 울면서 “장사를 지내기 전에 천 리 밖으로 떠나와 군무에 종사하고 있으니, 대체 모든 일을 누가 주장해서 한단 말이냐. 통곡한들 어찌하리!”라고 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날 일기에서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설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째서 내 사정을 살펴 주지 못하는고! 왜 어서 죽지 않는지.”라고 할 정도로 삶에 미련이 없었다.

 

5월 26일 비가 퍼 붓듯이 내리는 날, 이순신은 하동 경내에 들어섰다. 온몸과 행장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지금의 악양면 정서리에 도착했으나 잘 만한 곳이 없었다. 이순신이 김덕린이 빌린 집[이정란의 집이라 함]에 억지로 밀고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이정란의 집이 어디인지 현재는 알 수 없으나 집 앞이 무딤이들[『토지』의 배경인 악양들]이었다 한다. 다음날 날이 개자 이순신은 아침에 젖은 옷을 바람에 걸어 말린 후 저녁나절에야 길을 떠났고, 두치[현 하동군 하동읍 두곡리]의 최춘룡() 집에 이르러 하루 밤을 보냈다. 최춘룡의 집 역시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5월 28일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하동 읍내[현 고전면 고하리]에 도착하자, 하동현감 신진()이 기뻐하며 성 안 별채로 맞아들여 매우 간곡한 정을 베풀었다. 이틀 전에 몹시 고생했던지라 몸에 탈이 났던 이순신은 여기서 하루를 더 머무르고, 6월 1일 비가 내리는데도 아침 일찍 길을 떠나 정수역[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영당마을] 시냇가에 이르러 말을 쉬었다.

저녁 무렵 이순신은 진주 경내 사월리와 시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단성현 경내 사월리 박호원()의 농노() 집에서 투숙했는데, 주인이 기꺼이 접대하였으나 잠잘 방이 좋지 못하여 겨우겨우 밤을 지내고 아침 일찍 길을 떠나 단계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순신은 삼가를 거쳐 6월 4일 도원수부의 초입에 있는 마을에 도착하여 8월 3일 진주 수곡에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될 때까지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그 해 7월 18일, 초계 도원수부에서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이덕필()과 변홍달()로부터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 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고, 수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함을 참지 못했다.”라고 『난중일기』에서 적고 있다.

이순신과 늘 함께했던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서는 권율이 이순신을 보내어 진주에 달려가서 흩어진 군사를 모으도록 했다고 나온다. 이와 달리 『난중일기』 7월 18일의 기록에서는 “원수[권율]가 와서 ‘일이 이 지경으로 된 이상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고, 오전 열시가 되어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내가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듣고 난 뒤에 이를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니, 원수가 기뻐하여 마지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전자의 공식적인 기록에 비해서 후자가 사적인 일기여서 보다 구체적으로 밝혔다고 본다. 적어도 당시에는 이순신이 백의종군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7월 22일 선조는 7월 16일에 원균의 수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국당상()을 인견하여 대책을 논의하라고 했다. 그러나 한동안 비국당상은 말이 없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이다. 결국 다른 특별한 대책도 없이 논의만 분분하던 중 이항복()이 나섰다. 이에 앞서 이항복은 체찰사로 영남에 있으면서 이순신의 나명() 소식을 듣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인물이다. 이항복은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복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수사(使)를 차출하여 계책을 세워 방수하자고 하였다. 이에 선조가 동의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

 

역사를 배워가면서 필자는 간혹 가슴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을 때까 있다.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말처럼 당시 상황을 고려해서 객관적인 시야로 바라보라 하지만 가슴이 무너저내림은 어쩔 수가 없다.  그 중 가장 가슴아픔 역사가 이순신이 아닐까 한다. 난중일기를 읽었을 때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아닌 사람 이순신의 모습이 비쳐질 때면 필자는 생각한다.  ' 이 나라가 어떻게 되든 그냥 당신의 삶을 살라고 당신이 지켜낸 이 땅에서 참 염치없이 살고 있지만 당신이 애국이 나는 슬프다.' 고 말하고 싶다.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이 나라가 지금 가치있는 길을 가고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곤한다. 솔직히 필자는 가끔 이 나라가 부끄럽고 싫어진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