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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이순신장군 명량대첩, 노량해전 그리고 생을 마치다.

by 무님 2020.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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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장군이 백의종군하는 동안에도 전란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서 희망은 이순신장군뿐임은 자명한 일이였다.

 

7월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이순신이 힘써 길러온 무적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순신은 초계()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비국대신()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이리하여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조도 변명할 말이 궁하였던지 교서()에서 “지난번에 경의 관직을 빼앗고 죄를 주게 한 것은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 잘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오, 그래서 오늘날 패전의 욕을 보게 된 것이니 그 무엇을 말할 수 있겠소.” 하며 얼버무렸다.통제사에 재임용되어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7월 22일 선조는 7월 16일에 원균의 수군이 대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비국당상()을 인견하여 대책을 논의하라고 했다. 그러나 한동안 비국당상은 말이 없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이다. 결국 다른 특별한 대책도 없이 논의만 분분하던 중 이항복()이 나섰다. 이에 앞서 이항복은 체찰사로 영남에 있으면서 이순신의 나명() 소식을 듣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인물이다. 이항복은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복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수사(使)를 차출하여 계책을 세워 방수하자고 하였다. 이에 선조가 동의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라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하면서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붕괴된 조선 수군을 재건했으며, 10월 25일(음력 9월 16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척의 왜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명량대첩

 

이순신 장군은 명량해전()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고 보화도(: 목포의 )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로 영()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무산시켜 정유재란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한양으로 진공하던 왜군은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해 충청도 직산()에서 진격을 멈추었으며, 그 뒤 전쟁은 남해안 일대의 왜성()에서 농성하는 왜군을 조명연합군()이 공격하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1598년(선조 31)에도 절이도()와 고금도()에서 왜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은 그해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철수를 준비했는데, 이순신은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해 노량()에서 500여척의 왜군과 싸워 200여척의 적선을 불태우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노량해전).

 

노량해전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다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도주하던 적선을 추격하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이순신이 “싸움이 지금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숨이 끊어졌으며, 조카인 이완()이 그의 죽음을 숨긴 채 전투를 독려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이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은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도 이순신을 평하여 “유경천위지지재 보천욕일지공( )”이라 하여 높이 평가하였고, 이순신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선조실록』에서 사관()은 이순신의 죽음에 대하여 “이순신의 단충()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네. 비록 옛날의 양장()이라 한들 이에서 더할 수가 있겠는가. 애석하도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하였구나. 병신년·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갈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을 초래하여 양호지방(: ·)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로다”라고 평하였다.

 

정인보()는 「이충무공순신기념비()」에서 “공()은 명장보다도 성자()이다. 신묘불측()이 오직 지성측달()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는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순신은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 사후()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해전사연구가()이며 이순신을 연구한 발라드(G. A. Ballard) 제독은 이순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순신 제독은 서양 사학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순신의 업적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넉넉히 위대한 해군사령관 가운데서도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정신을 겸비하고 있었다. 어떠한 전투에서도 이순신이 참가하기만 하면 승리는 항상 결정된 것과 같았다. 이순신의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싸움이 벌어지면 강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승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는 점에 있어서는 넬슨(Nelson)과 공통된 점이 있었다.……중략……영국사람으로서는 넬슨과 어깨를 견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기란 항상 어렵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이순신은 한번도 패배한 일이 없고 전투중에 전사한 이 위대한 동양의 해군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이순신이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순신은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시조(調)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 여수의 충민사(), 아산의 현충사()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연간에 이 고장의 유생들이 이순신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 33)에 사액(), 입사()되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에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 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이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 이순신을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의 「이순신전()」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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