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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15대 왕 광해군 - 폐모살제 그리고 인조반정

by 무님 2020.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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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막이 내렸다. 의인왕후 사후 선조는 계비를 간택, 1606년 선조의 계비가 된 인목왕후가 그 후 영창대군(적자)을 낳자, 광해군을 내심 탐탁치 않게 여기고 미워하던 부왕 선조는 다시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파의 유영경 등도 적통론을 내세워 영창대군 옹립계획을 세운 선조를 지지하였다. 특히나 선조 자신이 서얼에다가 방계승통을 했다는 콤플렉스까지 겹치면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가 행해졌다. 그러나 선도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며 임진왜란 동안 많은 공을 세운 광해군이 대북파의 지지를 받아 1608년 왕위에 올랐다.

 

 

1609년 광해군은 자신의 세자 책봉 과정에서, 장자 승계 원칙을 주장하며 자신을 압박하던 명나라가 활용하던, 친형제이자 장자 임해군을 교동으로 유배하여 죽이고, 김직재의 옥과 계축옥사가 발생하자 1613년 영창대군을 추대하여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과 북인은 인목왕후의 의인왕후 능(陵) 저주설을 조작하기도 하였다. 김제남은 죽은 지 3년 만에 다시 부관참시되었으며 그 일족 또한 막내아들과 부인을 제외한 세 아들이 화를 당하였다. 임해군은 자신의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었다고는 하나, 광해군 자신의 유일한 친형제였고, 투명하지 못한 살해 과정으로 일부 신료들에게 의구심을 주기도 하였다. 영창대군 살해 역시 광해군과 북인들의 측근들이 치밀한 계획 아래 주도하여 결과적으로 광해군에게 패륜군주 이미지를 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만 하고 말았다.

1614년 광해군은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얼마 후 방 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펴 죽였다. 1615년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동생인 능창군까지 폐서인하여 교동에 안치해버리고, 결국 목을 매어 자결하게 하는 등 왕권을 위협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이는 그동안 기가 죽어 있던 서인 세력에게 반정의 명분을 제공하는 셈이 되었다.

광해군과 이이첨 일당은 영창대군 살해 시점 직후부터, 각종 조작설과 허균 등을 비롯한 강경파 관료, 유생들을 동원한 상소 릴레이를 펼치며 끊임없이 인목왕후 폐비 공작을 전개하였고, 1618년 폐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 사건으로 정국은 들끓었으며,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인조반정의 명목으로 삼았던 것이 < 폐모살제 > 인데 폐모살제란 '어머니를 유폐하고 동생을 죽였다.'라는의미이다

 

인조반정이란 1623년 이귀, 김유 등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사건을 말한다

계축옥사로 서인과 남인은 대부분 조정에서 쫓겨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김유()·이귀()·이괄()·최명길() 등 서인 일파는 사림 세력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하여 정변을 꾀했다. 1620년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과 가까웠던 이서()·신경진()·구굉()·구인후() 등이 정변을 모의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류()·이귀()·최명길()·장유()·심기원()·김자점() 등이 모의에 참여하면서 더욱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1622년(광해군 14) 가을에 이귀가 평산부사(使)로 임명된 것을 계기로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 하지만 대간()이 이귀를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으나 심기원과 김자점이 후궁에 청탁을 넣어 사건은 흐지부지되었다. 그 뒤 반정 세력은 장단부사(使)로 있던 이서가 덕진()에 산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게 되자, 그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키며 정변을 준비하였다.

반정세력은 이듬해인 1623년 음력 3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해 준비하였다. 그리고 훈련대장 이흥립()을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장단부사 이서와 이천부사(使) 이중로() 등이 군졸을 이끌고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이반()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정변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었다. 그래서 정변이 예정되었던 3월 12일 저녁에 박승종() 등은 추국청()을 설치해 고발된 모든 사람을 체포하려 했다. 하지만 후궁과 연회를 벌이던 광해군은 이를 재가하지 않았고, 붙잡았던 이흥립마저 풀어주었다. 결국 이이반의 고변으로 상황이 더욱 급박해진 반정세력은 예정대로 정변을 추진하기로 했다. 능양군은 친병()을 이끌고 연서역()으로 가서 이서 등과 합류하였는데, 무리가 1,400여명이 되었다. 이들은 삼경에 창의문()의 빗장을 부수고 도성으로 들어가 곧바로 창덕궁()으로 갔다. 이흥립은 궁궐을 지키던 병사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내응하였고, 초관() 이항()이 돈화문()을 열어 반정세력을 궐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정변은 손쉽게 성공하였다. 광해군은 후원문()으로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곧바로 붙잡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능양군은 새벽에 조정의 관리들을 소집하여 병조참판 박정길() 등을 참수하였으며,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상궁() 김씨()와 승지 박홍도() 등도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리고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회복시켜준 뒤에 그 권위를 빌어서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이처럼 광해군은 내정과 외교에 걸쳐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와 대북 정권을 무너뜨린 서인 세력에게는 한낱 패륜적인 국왕, 국제적 신의를 저버린 인물, 탐욕에 눈이 멀어 무리한 궁궐 공사를 감행하여 백성들을 고역에 빠뜨리고 종묘사직을 무너뜨린 군주로밖에 비쳐지지 않았다. 그 결과 광해군은 통상의 다른 왕들이 갖는 묘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묘호()이다. 묘호는 국상을 마친 뒤 신위를 종묘에 안치할 때 붙여지는 이름이다. 당사자 사후에 붙여지는 이름이니 당사자들은 알 리가 없는 이름이다. 묘호의 제정은 또한 제정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나 권력의 향배가 중요한 변수이다

 

광해군과 문화유씨 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조선후기 제15대 광해군과 왕비 문화유씨의 능이 있다.1623년 광해군과 함께 폐출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으며 그해 10월 강화도에서 죽어 양주군 적성동에 장사지냈다가 광해군이 죽은 뒤 같은 묘역에 천장하였다. 비석, 혼유석, 향로석이 쌍분 앞에 각기 설치되어 있으며 석망주 1쌍, 문석인 1쌍이 서로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광해군 묘비 전면에 ‘광해군지묘()’, 후면에 ‘신사칠월초일일병졸어제주명철조삼일( )’이라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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