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조선전기 계유정난의 설계자로서,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한명회는 또한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 들이면서 왕의 장인으로서, 지략으로 당대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였다.
한명회는 잉태된 지 7달 만에 태어나, 어려서는 사지가 완전치 못했는데, 차츰 장성하면서 체구가 보통 사람의 갑절이나 커지고, 또 지모가 남달리 뛰어났다. 젊었을 때에 절에서 글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에 산골짝을 가는데 범이 그를 호위하고 갔다. 공이 이르기를, “멀리까지 와서 보내 주니 족히 후의를 알 수 있네.” 하였더니 범이 마치 머리를 숙이고 꿇어 엎드리는 듯이 하더니 날이 밝을 무렵에야 갔다. 또 한 번은 그가 영통사란 절에 들러 머무른 일이 있었다. 그때 늙은 중 한 사람이 그의 상을 훑어보고 조용히 말하기를, “당신의 머리 위에는 혁혁한 기운이 있어서, 뒤에 반드시 귀하게 되겠소. 그리고 명년에는 지기(知己)를 얻게 될 거요.”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한명회는 크게 기뻐하고는, 바로 발걸음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그것은 수양대군이 거사를 준비하면서 책사와 장정들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얻어들었기 때문으로, 이미 수양대군 측에 들어가 있던 친구인 권람을 찾아갔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한명회는 개성의 경덕궁직을 지내던 한미한 관원이었다.
왕의 숙부 수양대군은 약해진 왕권을 회복한다는 명분 하에 비밀리에 거사를 모의하였다. 수양대군은 전국에서 책략가와 한량들을 몰래 모았는데, 그 가운데 자원해서 수양대군에게 접근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한명회였다.
“지금 임금은 어린데, 범 같은 대군들이 도사리고 있어 백성들의 소문이 자못 어지러운 이때에 큰일을 꾀하시는 분들이 어찌 이리 한가하시오. 들으니 수양대군은 위대하시고 매우 용맹스럽다기에 내 뜻한 바 있어 찾아왔거니와, 우리 함께 그를 추대하고 대사를 도모하여 명성을 떨쳐 보지 않으시렵니까.” 한명회가 친구 권람에게 한 말로, 이를 계기로 권람의 추천을 받아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대면하게 되었다. 수양대군은 여러 모로 한명회를 시험하고는 한명회를 가리켜 “그대야말로 나의 자방(子房)이로다!”라고 후대하였다. 자방이란 중국 한나라 때의 책사 장량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수양대군 측의 모든 계책은 한명회로부터 나왔다.
한 번은 수양대군 측에 쓸 만한 무사들이 없음을 보고는 수양대군에게 비밀히 말하여 무사들과 결탁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수양대군이 그 방법을 묻자, 한명회는, “이것은 가장 쉽습니다. 활쏘기 연습이란 명분으로 술과 안주를 많이 장만해서 매일 모화관(慕華館)과 훈련원으로 나가 활쏘기를 하고 나서, 무사들을 먹이면 다 사귀실 수 있습니다.” 하였다. 이처럼 한명회는 수양대군 측의 일등 모사였다.
한명회는 계유정난의 공으로 정난공신에, 사육신 사건 처리 뒤에는 좌익공신에 책록되었고, 이어 1468년(예종 1년)에 발생한 남이의 옥사 처리 뒤에는 익대공신에, 그리고 성종 즉위 후에는 좌리공신에 책록되는 등 채 20여 년도 안 되는 사이에 4번의 공신에 책록되었다.그것도 모두 1등공신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절친한 친구이면서 혼맥으로 연결된 권람이나 신숙주 등 역시 함께 공신에 책록되었으니,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자였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역사상 이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군의 세력을 훈구세력이라고 부르고 있다.
최고의 권력을 구가하던 한명회는 1476년(성종 7년) 남은 여생을 유유자적하기 위해 한강 가에 압구정이란 정자를 지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그의 화려했던 정치적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될 줄은 그 당시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한명회 소유의 정자였던 압구정이라는 명칭은 한명회가 중국 문객 예겸에게 부탁해서 받은 것이었다. 한명회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예겸과 마주 앉아 시로서 서로 응대하던 차에 한명회가 예겸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 것이다. 이에 예겸은 압구(狎鷗)라고 이름하고 또 기(記)를 지어 주었던 것이었다. 압구정이 완성되는 날 성종은 이를 기려 압구정시를 직접 지어 내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젊은 관료들의 반발로 철거되었다.
그런데 워낙 풍광이 좋은 터라 그 소식이 중국까지 알려졌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사신이 오게 되면 반드시 거치는 코스가 되었다. 1481년(성종 12년) 이때도 역시 중국 사신이 와서 압구정을 관람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한명회는 좁다는 이유를 들어 사신의 방문을 거절하였으나, 계속되는 사신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방문을 허가하였다.문제는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한명회가 자신의 정자가 좁아서 중국 사신이 방문하여도 잔치를 열수 없다는 구실로, 국왕이 사용하는 차일을 청하였던 것이다.
“신의 정자는 본래 좁으므로 지금 더운 때를 당하여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담당 관서를 시켜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큰 장막을 치게 하소서.” 그러나 성종은 이를 허가하지 않고 매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경(卿)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다시 무엇을 혐의하는가? 좁다고 여긴다면 제천정(濟川亭)에서 잔치를 차려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보첨만(補簷幔 처마에 잇대는 장막)을 청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다시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도록 하고 이를 불허하였다. 그러자 한명회도 여기서 굴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 아내가 아파서 잔치에 나갈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단히 진노한 성종은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우리 나라 제천정의 풍경은 중국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희우정(喜雨亭)은 세종(世宗)께서 큰 가뭄 때 이 정자에 우연히 거둥하였다가 마침 신령스러운 비를 만났으므로 이름을 내리고 기문(記文)을 지었으니, 이 두 정자는 헐어버릴 수 없으나, 그 나머지 새로 꾸민 정자는 일체 헐어 없애어 뒷날의 폐단을 막으라.”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후 승지나 대간의 비난이 한명회에게로 쏟아졌다. 이때마다 성종은 한명회의 잘못을 꾸짖는 선에서 일을 매듭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성종도 한명회의 국문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벼슬을 떠나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로 지은 정자가 그를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것이다.
한명회의 묘와 신도비는 충청남도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 11-1에 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 폐사(廢死)에 관련되었다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가 중종반정 이후 1506년 신원되었다. 1487년 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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