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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세조의 숙적 김종서

by 무님 2020.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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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는 1383(우왕 9) 태어나 1453(단종 1)죽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 자는 국경(), 호는 절재(). 할아버지는 지평 김태영()이고, 아버지는 도총제() 김추()이며, 어머니는 대사헌 배규()의 딸이다. 그는  세종 때 6진 개척을 주도한 인물로, 그리고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 세력에 의해서 살해된 인물로 잘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300여 년이 지난 영조 대에 복권되면서 충의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각인되고 있다.

 

1405년(태종 5) 식년 문과에 동진사()로 급제해 1415년 상서원직장()을 지냈다. 1418년(세종 즉위년) 11월 감찰로서 강원도의 답험손실(: 실지 답사를 통해 수확량을 조사함)로 원성이 크자 조정에서 다시 조사하게 하였다.

1419년 3월 행대감찰()로서 충청도에 파견되어 진휼 상황을 조사했고, 같은 해 10월 우정언()이 되었다. 1420년 윤정월에 광주판관() 거쳐 봉상판관()으로 있으면서 의주·삭주도()의 진제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

1426년 4월에는 이조정랑으로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침입한 왜인의 포획 상황을 조사, 보고하였다. 1427년에는 민정을 살피기 위해 황해도경차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특히, 세종의 신임이 두터워 1433년 좌대언()인 김종서에게 이부지선(: 이조의 인사권)을 관장하도록 특명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 함길도도관찰사가 된 뒤 7, 8년간 북변에서 육진()을 개척해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김종서 6진을 개척하다

 

1445년에는 충청·전라·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파견되어 삼남 지방에서 목마장으로 적합한 곳과 말을 놓아 기를 수 있는 곳의 수효를 조사해 보고하였다. 1446년 의정부우찬성으로 임명되고 판예조사()를 겸했으며, 이듬해 충청도에 파견되어 태안 등지의 책보()를 살펴 정했다.

1449년 8월 달달(, Tatar) 야선()이 침입해 요동 지방이 소란해지자 그에 대처하기 위해 평안도도절제사로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소환되었다.

1451년(문종 1) 좌찬성 겸 지춘추관사()로서 『고려사()』를 찬진했고, 같은 해 10월 우의정이 되었다. 1452년 『세종실록()』 편찬의 감수를 맡았고 『고려사절요()』를 편찬해 올렸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필하다가 이듬해 수양대군에게 살해되었다.

육진 개척의 수장으로서, 강직하고 위엄을 갖춘 관료이자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 책임자이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무관직에 있었고 육진 개척에서 이룩한 공로가 있어 흔히 무장으로 알기 쉬우나, 강직·엄정하고 밝은 문인·학자였으며, 유능한 관료이기도 하였다.

강직·엄정한 면모는 사헌부·사간원의 이력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고제()와 의례에 조예가 깊어 육진 개척의 일을 마친 뒤 형조판서를 거쳐 예조판서에 임명되고, 1446년 우찬성으로서 판예조사를 겸하였다.

또한, 관료로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되자, 위세가 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한 위세는 단종이 즉위하면서 더욱 심해져 "그의 전횡과 독단이 너무 심하다."라는 명나라 사신의 평을 받기도 하였다.

세종은 권제()·안지() 등의 『고려사()』 개수 작업이 미비한 것을 보고 1449년 김종서·정인지() 등에게 고쳐 쓰기를 명하였다. 그 작업은 2년 후에 완성되었는데, 이 때 집필과 교열을 맡은 이들은 김종서 외에는 모두 집현전의 관료 출신들이었다.

집현전 출신이 아니면서도 당시 최고 수준의 학자·관료였던 집현전 학사와 그 출신들을 지휘해 『고려사()』 편찬의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김종서의 학자적 능력을 보여주는 면이라 할 수 있다.

1451년 새로 편찬된 『고려사()』를 왕에게 올리는 자리에서 편년체의 『고려사()』 편찬을 건의하자, 왕이 즉시 편찬의 착수를 명해 이듬해에 『고려사절요()』가 이루어졌다.

같은 해 『세종실록()』의 편찬 때에는 책임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세종실록에는 따로 지()를 만들어야 마땅하다.”고 한 정인지의 의견을 지지해 『세종실록()』에 오례·악보·지리지·칠정산내외편() 등의 전문적인 자료가 정리되어 실리게 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문종은 승하 직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는 정부를 개편한 바 있었다. 이때 영의정에 황보인을, 좌의정에는 김종서를, 우의정에는 정분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승하에 임박해서는 이들을 비롯해 육조 판서 등을 불러놓고 세자를 앞에 세운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해놓은 일 없이 가거니와 잊지 못하는 것이 이 어린 세자요. 나는 이제 경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노니, 부디 저버리지 말고 힘써 보호하여 주기 바라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어느 누가 부왕의 세자에 대한 애틋한 심정을 모르겠는가? 이 순간 모두 세자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으리라.

그렇게 문종이 덧없이 승하하고 그 뒤를 열두 살의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런 순간에 수양대군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전국에서 책략가와 한량들을 모았다. 한명회∙권람∙홍윤성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여러 모사와 수많은 장정을 불러 모아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된 수양대군은 서서히 그 야심의 날개를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수양대군에게도 만만치 않은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은 단종을 보필하고 있는 고명을 받은 대신들, 그중에서도 좌의정 지위에 있는 김종서였다.

 

단종이 즉위한 뒤 의정부서사제() 아래서의 의정부 대신들의 권한은 왕권을 압도할 정도였다. 특히, 학문과 지략에 무인적 기상을 갖춘 위세는 당시 ‘대호()’라는 별명을 듣기에 족하였다.

 

따라서 수양대군이 야망을 실현하는 데 가장 문제되는 인물로 지목되었다. 

수양대군이 대사를 추진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실로 수양대군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인 동시에, 또한 제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살려두고는 대사를 도모하기 불가능함을 깨달은 수양대군은, 마침내 치밀한 타도의 계획을 세운 다음, 친히 양정, 유숙을 비롯한 몇 사람의 장사를 대동하고, 새문 밖 김종서의 사저로 향하여 거사에 성공함으로써 걸림돌을 제거하였다.

 

김종서의 묘

 

김종서는 결국 계유정난 때 제거되었다.  이렇게 한순간에 두만강의 벌판을 호령했던 큰 호랑이 김종서는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그 뒤 1678년(숙종 4) 후손들이 채용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복관되었다. 시호는 충익()이다.

 

묘역에는 입구 주변에 관리사, 신도비, 홍살문 등이 있고, 묘소로 가는 길에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의 명정 현판을 모신 정려각이 있다. 그 외에 묘소에는 문인식, 동자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과 묘비 3기가 있다. 1977년 1월 6일에 충청남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12월 31일에 세종특별자치시 기념물 제2호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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