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성종, 훈구세력의 견제, 사림의 김종직을 들이다

by 무님 2020. 3. 15.
728x90

김종직은 조선전기 병조참판, 홍문관제학,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학자이다. 경상남도 밀양 출신. 본관은 선산(). 자는 효관()·계온(), 호는 점필재(). 아버지는 사예 김숙자()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사재감정() 박홍신()의 딸이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계승하여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도학 정통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1453년(단종 1)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이듬 해 사가독서(: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였으며, 1462년 승문원박사 겸 예문관봉교에 임명되었다. 이듬 해 감찰이 되고, 이어서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쳤으며, 1476년(성종 7)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486년에는 신종호()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輿)』을 편차()하여 문장가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훗날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하여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조·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절의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하였으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까지 전해져 이들 또한 절의를 높이고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김종직

 

고려 말 정몽주()·길재()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하여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되었다. 김종직은 문장·사학()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김종직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남효온()·조위()·이맹전()·이종준()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종직의 도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굉필은 조광조()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켰다.

김종직의 도학이 조선시대 도통()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김종직이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 점이 높이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은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유록()』·『청구풍아()』·『당후일기()』 등이 있으며, 편저로는 『일선지()』·『이존록()』·『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어 김종직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성종이 즉위한 후 집현전의 예에 의거하여 예문관의 인원을 늘려서 문학하는 선비를 선발하여 충당시켜 모두 경연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김종직은 수찬()에 선발되었다. 이후 김종직은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지방 관직을 자처하였고, 함양군수()로 나가게 되었다. 1471년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은, 관내의 정자에 유자광(, 1439~1512)이 쓴 시를 걸어둔 것을 발견했다. 김종직은 “그 따위 자광()이 감히 현판을 걸었단 말이냐.”하고는, 즉시 명하여 거두어서 불태워버리게 하였다. 이 사건은 1498년 무오사화를 주모한 유자광이 김종직에게 복수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1475년 김종직은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승문원 참교()에 제수되었지만, 어머니가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선산부사(使)에 제수되었다. 함양군수, 선산부사 등 영남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등 훗날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몰려들었다. 1479년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고, 삼년상을 마치고는 금산()에 있다가, 1482년에 왕명을 받고 다시 중앙으로 올라왔다. 이후 성종의 깊은 신임 속에 승진을 거듭하여 홍문관 응교, 직제학,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이조참판 등 중앙의 요직을 두로 거쳤다. 당시 경연당상()은 다만 조강()에 참여하여 모셨을 뿐이었는데, 성종은 특별히 김종직을 주강()에도 참여하게 하였다. 1485년 55세로 이조참판으로 있던 중 남평() 문씨 문극정()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그때 부인의 나이 18세였으니, 그보다 무려 37살이나 어렸다. 새로 결혼한 이듬해에는 늦둥이 아들 숭년()을 얻는 기쁨을 얻었다. 1487년 전라도관찰사, 1488년 공조참판을 지냈고, 1489년 형조판서를 제수 받았으나, 신병이 심해져 사직을 하고 밀양의 옛집으로 돌아갔다가 이곳에서 1492년 6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김종직의 묘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1457년에 지은 조의제문()을 사관()인 김일손이 사초()에 적어 넣은 것이 훈구파의 거물급이었던 이극돈()에게 발각되었고 같은 훈구파 세력이었던 유자광 등이 주도하여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애도하는 글이었다. 이 사건으로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그의 문집이 모두 소각되고, 김일손 ·권오복() 등 많은 제자들과 사림파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중종()이 즉위하여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되자 김종직의 신원이 회복되고 숙종() 때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728x90

'조선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종 , 반정을 일으키고 왕이 되다.  (0) 2020.03.15
조선 11대 왕 중종 - 이역  (0) 2020.03.15
조선 8대 왕 예종 - 남이의 옥  (0) 2020.03.14
세조의 숙적 김종서  (0) 2020.03.14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  (0) 2020.03.1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