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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11대 왕 중종 - 이역

by 무님 2020.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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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은 1488년에 태어나 1544년에 사망했으며 재위기간은 1506년부터 1544년까지인 38년2개월간이다. 조선의 제9대 임금 성종과 계비인 정현왕후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했다. 왕자 시절의 이름은 진성대군이며 이복형인 연산군의 폭정이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다. 연산군 시기의 폐해를 개혁하기 위해 조광조와 같은 신진세력을 등용해 왕권 강화를 시도하지만, 훗날 기묘사화로 그들을 숙청한다.

 

중종 어진화

 

자는 낙천(樂天), 휘(諱) 역(懌)이다. 성종의 2남이며 연산군(燕山君)의 이복동생이다. 어머니는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 비는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 제1계비(繼妃)는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제2계비는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晉城大君)에 봉해졌다.

 

1506년에 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 ·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반정군에 의해 추대 제의를 여러 번 받을 때부터 그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다(澤君)는 것에 부정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공신들의 세력은 막강하였고 중종 반정으로 추대된 이후 그는 이를 타개할 대안을 마련하는 데 절치부심하게 된다.

 

1519년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훈구파의 모함에 따라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를 숙청하였다. 그 뒤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었으며, 또 1521년에는 송사련()의 무고로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일당이 처형되었다.
1524년 권신() 김안로()의 파직, 1525년 유세창()의 모역사건, 1527년 작서()의 변에 따른 경빈() 박씨()의 폐위 등 크고 작은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1531년 김안로의 재등장으로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였는데, 문정왕후를 배경으로 한 윤원로() ·윤원형() 형제가 등장하여 1537년(중종 32) 김안로를 숙청하였으나, 이번에는 윤원형 일당의 횡포가 시작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라의 남북에서 외환이 그치지 않아, 1510년(중종 5)의 삼포왜란(), 1522년 동래() 염장()의 왜변(), 1524년 야인()의 침입, 1525년 왜구()의 침입 등이 잇달았다. 치세 초기에는 미신타파를 위하여 소격서()를 폐지하고, 과거제도의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현량과()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향약()을 권장하여 백성들의 상조()정신을 고취시켰다.

또, 그 시기에 《소학()》 《이륜행실()》 《경국대전()》 《대전속록()》 《천하여지도(輿)》 《삼강행실()》 《신증동국여지승람(輿)》 《이문속집집람()》 《대동연주시격()》 등 다방면에 걸친 문헌이 편찬 ·간행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 이후 이와 같은 문화발전을 위한 정책은 거의 정지되었다. 다만, 치세 말기에 군적()의 개편과 전라도 ·강원도 ·평안도에 대한 양전()을 실시하였으며, 진()을 설치하고 성곽을 보수하는 한편, 평안도 여연() ·무창() 등지의 야인을 추방하는 등 국방정책을 추진하였다.

한편,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활자를 개조하고, 지방의 사실()을 기록하기 위하여 외사관()을 임명하였으며, 1540년(중종 35) 역대 실록()을 인쇄하여 이를 사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중종의 치세에서 처음에는 어진 정치를 펴는 데 상당히 의욕적이었으나, 기묘사화 이후 간신()들이 판을 치는 통에 정국은 혼미를 거듭하여 볼만한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능은 경기 고양()으로 하였다가 1562년(명종 17)에 이장하였다. 능호는 정릉()이며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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