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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중종의 조강지처 단경왕후 신씨 그리고 치마바위

by 무님 2020.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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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폭정이 지속되자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을 중심으로 반정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때 목숨만 겨우 버티던 왕자였던 중종이 하루 아침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때 중종의 나이 19세였다. 중종은 한 번도 정식으로 왕위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저 무능한 형을 대신해 신하들에게 떠밀리다시피 왕이 된 것이었다. 즉 정통성을 이어받은 왕이 아닌, 그저 신하들의, 신하들에 의한, 신하들을 위한 임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종은 조강지처까지 버려야 했다.

 

중종의 왕비 신씨는 반정 때 반정군에 죽임을 당한 신수근의 딸이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의 아들로 연산군과 처남 남매 간이었다. 신씨는 1487년인 성종18년 1월 14일 신수근의 딸로 태어났다. 1449년인 연산군5년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부부인으로 봉해졌다가 중종 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신수근은 반정을 모의하던 서희안 등이 찾아와서 자신의 뜻을 떠보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연산군은 매제이고, 진성대군은 사위었기 때문에 지금의 임금이 횡포해도 세자가 어리니 그에게 기대를 걸고 참여하지 않았다. 반정에 성공하자 공신들은 중종에게 왕비를 폐출할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왕비의 아버지를 죽인 자신들에게 언제 화가 다가올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왕비 신씨에게는 연산군의 부인이 고모가 되었다. 연산군의 왕비 신씨는 대비를 잘 받들었고, 후궁들을 너그럽게 거느렸으며, 남편 연산군에게 그의 잘못을 간했었다. 폭군 연산군도 그녀를 두려워했다 한다.

 

반정 공신들은 중종의 어머니 자순대비를 찾아가서

" 대비마마, 신수근은 역적이옵니다. 역적의 딸을 왕비로 두시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오니 즉시 폐하시옵소서 "라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

 

마침내 중종은 신하들의 뜻에 따라 사랑하는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가로 보내었다. 그녀가 왕비가 된 지 7일 만의 일이었다. 중종은 신하들의 강압에 못 이겨 왕비를 폐출하였으나 왕비가 그리워 밤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중종은 왕비 신씨와 금실이 매우 좋았다. 폐비 신씨는 하성위 정현조의 집에 잠깐 머물다가 죽동궁으로 옮겼다. 중종은 그녀가 그리워 높은 누각에 올라 그녀의 집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마침내 이러한 일이 소문으로 퍼지자 신씨 집에서도 집의 뒷동상의 바위에 붉은 치마를 둘러놓고 왕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폐출된 신씨 역시 왕을 그리워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폐왕비 신씨는 사람들에게 점차 잊혀져 갔고 신씨는 남편 중종과 생이별한 후 인왕산 치마 바위 전설을 나기고 한번도 만나지 못한 채 외롭게 한평생을 보내다가 1557년인 명종12년 12월 사저에서 71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단경왕후 온릉

 

7일의 왕비로 있었던 신씨는 아버지 신수근의 묘 옆에 묻혀다. 신씨가 궁궐에서 쫓겨나 폐비가 된 지 232년, 1739년인 영조15년에 비로소 복위되어 단경왕후로 추존되고 , 능호를 온릉이라 했으며 현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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