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사전에 발각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충신들로 성삼문 · 박팽년 · 유응부 · 이개 · 하위지 · 유성원 등 핵심 인물 6명을 일컫는 말이다. 생육신은 김시습 · 원호 · 조려 · 성담수 · 남효온 · 이맹전을 일컫는 말로 사육신의 정신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를 지녔다.
성삼문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동문수학했던 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 등 뜻이 맞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하였고 무인인 유응부도 거사에 합류했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결국 실패로 끝났고 모두 체포되어 참수당했다. 당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화를 입은 인물은 사육신을 비롯해 권자신, 김문기 등 7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가 단종 복위 운동에 나선 인물을 대개 사육신으로만 알고 있는 까닭은 바로 생육신으로 자처했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육신전」을 저술한 것에서 비롯된다.
남효온은 자신의 문집인 『추강집』에 사육신에 관한 기록을 「육신전」으로 남겼고, 수양 대군의 불법에 맞서 저항한 이들의 명성은 재야의 사림(士林)들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이후 사육신은 성리학의 이념인 충절과 의리가 한층 강화된 조선 후기 숙종대를 거쳐 정조대에 이르러 마침내 국가적인 공인을 받게 되었다.
사육신의 충절은 세조의 모진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사육신의 일화을 보면 알수있다.
' 성삼문은 세조의 모진 고문에 꿈쩍하지 않다
세조는 믿고 있던 성삼문이 자신을 배신하려 했다는 것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어찌 나를 배반하려 하느냐!”
성삼문은 대답했다.
“나는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했을 뿐이오. 나의 임금이 왕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었소.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듯이 백성에게도 왕이 둘일 수는 없는 것이오.”
성삼문의 말에 화가 난 세조는 다시 한 번 따졌다
“너는 내가 내린 녹1)을 먹고도 어떻게 나를 배반할 수 있는가?”
“나는 나리의 녹을 먹은 적이 없소이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 집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시구려.”
사람을 보내 조사해 보니 세조에게 받은 녹은 따로 쌓아 두고 건드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어느 달의 녹’이라고 기록해 놓기까지 했었던 것이다.
세조는 성상문의 대답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쇠를 달구어 성삼문의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 자르게 했다. 끔찍한 고문에도 성삼문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
또한 박팽년은 세조의 신하가 되길 거부하기도 했다
' 꼿꼿하기는 박팽년도 성삼문과 마찬가지였다.. 박팽년은 집현전 학사로 세종의 사랑을 한껏 받은 신하였다.
박팽년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준 것을 알고, 연못에 빠져 죽으려고 했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마음을 굳게 고쳐먹었어고 살아서 단종에게 다시 왕위를 찾아주고자 한 것이였다.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높이 샀기 때문에 그를 구슬렸다.
“네가 마음을 바꿔 나를 섬긴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마.”
“나리, 필요 없습니다.”
세조는 그가 ‘나리’라고 부르는 것에 화가 났다. 그것은 세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세조, 다시 한 번 박팽년의 마음을 돌리려 하다
“네가 예전에는 이미 신하라고 말한 바 있지 않느냐? 지금 와서 아니라 해도 소용없다. 너는 관직에 있을 시절 내게 문서를 올리며 스스로 신하라고 칭하지 않았느냐? 그때는 나를 임금으로 모시더니 지금은 나리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나는 한 번도 신(臣)이라고 하지 않았소.”
박팽년의 말은 사실이었어던 것이다. 문서에 ‘臣(신하 신)’이라는 글자는 모두 ‘巨(클 거)’자로 쓰여 있었다. 박팽년은 결국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한편 이 시기에는 김시습을 비롯해 남효온·원호·조려·성담수·이맹전·권절·정보 등 사육신의 충절을 따라 관직에 오르지 않고 은둔하고자 하는 지식인들이 다수 존재했다. 또한 숙종 연간에는 강원도 선비들이 상소하여 사육신의 사당에 배향하기를 청하였고, 영조 연간에는 영월 선비들이 팔현사(八賢祠)를 육신의 사당 옆에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사육신의 충절을 계승한 선비는 많았지만 사육신이 여섯 명인 만큼 앞서 언급한 여덟 명 중 권절과 정보를 제외한 여섯 명을 특별히 생육신이라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김시습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전국을 유랑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원호는 원주의 남송촌에서 세상을 등졌다. 이맹전은 선산 강정리 전원에 묻혀 살았는데 대궐을 향해 앉지도 않았다고 한다. 조려는 낙동(洛東)으로 돌아와 낚시질로 생을 마쳤는데 '세상을 등지고도 번민함이 없는 뜻이 김시습과 같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담수는 부친 성희가 성삼문의 역모 죄에 연좌되어 벼슬길이 막힌 채 죽자 파주의 어버이 묘 밑에 살면서 한 번도 한양에 이르지 않았다고 한다.
남효온은 「육신전」을 저술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적극적으로 세조의 비행을 고발한 인물이었다. 세조 권력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체제 비판적 지식인의 행적을 기록한 「육신전」을 쓴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자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생육신의 존재는 세조의 불법적인 왕위 찬탈에 맞서 은둔과 울분으로 평생을 지낸 지식인이 다수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이들의 행적과 사상은 사림파로 이어지게 되고 사림파는 결국 훈구파를 대체하며 역사의 승리자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김시습 등 생육신의 절의 정신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성장에 커다란 토양분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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