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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세종이 사랑한 신하 장영실

by 무님 2020.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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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시대 최고의 과학자로 기억되는 장영실(). 역대 과학자 가운데 장영실만큼 이름이 회자되는 인물도 없지 않을까 싶다. 장영실은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 자격루를 한국 최초로 만든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할 정도로 유명인이었지만, 정작 그의 삶은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기도 하다.장영실이 어떻게 출생하여 성장했는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까닭은 그의 출생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종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 즉 노비였다. [세종실록]에는 장영실의 부친은 원()나라 사람으로 소주()·항주() 출신이고, 모친은 기녀였다고 전한다.

 

실상 부친이 관노가 아니었음에도 장영실이 관노가 된 것은 모친의 신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은 신분상 천민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엄격한 신분제도에 따라 관기가 딸을 낳으면 어머니를 따라 관기가 되었고, 아들은 관노가 되었다.

신분제도라는 굴레 탓에 천인에 속하는 어머니 신분을 따라야 했지만, 부친이 원나라 출신의 귀화인이었다는 점은 다른 관노와는 다른 점이다. 태조에서 세종대까지 조선 정부는 귀화인들의 정착을 위해 조선 여자와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귀화인들과 혼인한 여성들은 대체로 관노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족() 혹은 족장과 같은 출신 배경이 좋은 귀화인들은 대체로 양인 여성과 혼인하였다. 따라서 장영실의 모친은 정실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장영실은 이미 태종 때부터 그 능력을 인정받아 궁중기술자로 종사하였다. 제련()·축성()·농기구·무기 등의 수리에 뛰어났으며 1421년(세종 3년)에 윤사웅·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고 이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정5품 상의원() 별좌()가 되면서 관노의 신분을 벗었고 궁정기술자로 활약하게 된다.

 

장영실이 상의원 별좌 자리에 오르게 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라는 관직을 주려 했던 세종은 이 문제를 이조판서였던 허조()와 병조판서였던 조말생()과 의논했다. 이 논의에서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며 반대했고, 조말생은 “가능하다.”라고 했다. 두 대신 간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자 세종은 재차 다른 대신들을 불러 이 문제를 상의했는데, 대신 중에 유정현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라고 하자 곧바로 장영실을 상의원 별좌로 임명했다. 상의원()은 왕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이었지만, 월급은 없는 무록관(祿)이었다.

이후에도 장영실이 자격루 제작에 성공하자 세종은 공로를 치하하고자 정4품 벼슬인 호군()의 관직을 내려주려 했는데 이때도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황희가 “김인이라는 자가 평양의 관노였으나 날래고 용맹하여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신 적이 있으니, 유독 장영실만 안 된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호군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1432년에 경복궁과 서운관 두 곳에 설치할 많은 천문관측의기(天文觀測儀器)를 만드는 계획이 착수되었는데, 이때부터 이천(李蕆)과 함께 천문기기를 설계하고 제작을 지휘하였다. 먼저 간의(簡儀)와 혼천의(渾天儀)의 두 기본 관측기계를 완성하였고, 1437년에 완성된 천문관측의기에는 대간의·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규표(圭表) 등이 있다.

그가 이룩한 가장 훌륭한 업적은 1434년에 완성된 자격루(自擊漏)의 제작이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김빈(金鑌)과 함께 제작한 이 자동 시보장치의 물시계는 중국과 아라비아의 자동 물시계를 비교, 연구하여 새로운 형태의 물시계를 만든 것이었다. 그 공로로 대호군에까지 승진하였고, 그 은총에 보답하려고 다시 천상시계와 자동 물시계 옥루(玉漏)를 만들어냈다. 1438년에 만들어져 흠경각(欽敬閣)에 설치된 이 옥루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중국과 아라비아의 물시계에 관한 모든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하여 이룩한 독창적인 천상시계였다. 또, 이천 등과 함께 금속활자의 주조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조선시대의 활판인쇄기술을 대표하는 갑인자(甲寅字)와 그 인쇄기를 완성하였다.

 

 

장영실에 관한 기록은 거의 20년간에 걸친 그의 극적인 공적 활동에만 국한되어 있다. 출신 배경도 의문이지만, 1442년에 대호군 자리에서 파면된 이후로 그의 만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442년(세종 24년)에 장영실은 임금이 탈 가마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장영실의 임무는 제작 감독이었다. 그러나 그 가마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부서져 버렸다. 사헌부에서는 왕이 다친 것은 아니었으나 안위와 관련된 일이므로 장영실을 비롯한 참여자들은 불경죄로 관직에서 파면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울러 곤장까지 맞아야 한다고 했다.

사헌부의 탄핵이 올라오자 세종은 망설이다가 형벌을 내리기로 결정했는데, 그토록 총애하던 장영실에 대해 배려해 준 것이라고는 곤장 100대의 형을 80대로 감해 준 것뿐이었다. 과거 그의 실수에도 과감히 눈 감아준 전력과는 차이가 있다. 그 뒤 장영실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간 세종의 남다른 관심과 장영실의 재주 등을 고려해볼 때 장영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이에 대해 간의대 사업으로 인한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로부터 장영실을 보호하려 했다는 주장과 천문의기 프로젝트가 끝나버려 장영실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주장 등 여러 견해가 있지만 신빙성 있는 주장들은 아니다.

 

세종이 이루고자 했던 꿈들을 이루어 준 이가 장영실이었던 것이다. 만약 세종이 장영실을 만나지 못 했더라면 세종의 많은 업적 중 일부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못 했을 것이다. 낮은 신분으로 세상을 바꿀만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장영실이 세종을 만났을 있었던 것도 많은 꿈을 가지고 있던 세종이 장영실을 만나게 된 것도 하늘이 내릴 행운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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