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세조실록

by 무님 2020. 3. 11.
728x90

<세조실록>은 조선왕조 제7대 왕 세조의 재위기간인 1455년 윤6월에서 1468년 9월, 14년가의 역사를 기로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음 <세조혜장대왕실록>이며, 모두 49권 18책으로 간행되었다. 끝의 2권은 세조 대에 제작한 악보를 수록한 것으로, <세조실록>의 악보와 함께 아악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세조실록>은 세조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 즉 예종 원년인 1469년 4월 1일에 춘추관 실록청을 설치하고, 신숙주. 한명회를 영춘추관사, 최항을 감춘추관사. 강희맹.양성지를 지춘추관사, 이승소. 김수령. 정난종. 이영은. 이극돈. 예승석을 동지 춘추관사에 임명하여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세조실록>은 처음 6방으로 나누어서 편찬하였으나, 그 해 1월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이 즉위하자 6방을 3방으로 줄이고 편찬을 계속하여 2년 후인 성종 2년인 1471년 12월 15일에 완성하였다. 

세조의 능호는 광릉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음 부평리에 있다.

 

세조실록 악보 머릿말

 

<세조실록>의 내용은

세조의 이름은 유, 자는 수지이며,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이다. 처음 진평대군으로 봉해졌다가. 1445년 세종27녀에 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자질이 영민하여 유교의 경전과 사서에 능통하였고, 무술을 좋아하여 병학. 역산. 음률. 의약, 복서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에 군비를 강화하여 두 번이나 압록강, 두만강 건너편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이징옥 난과 이시애의 나을 진압하였다. 또한 안으로 국가의 모든 제도를 정비하고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여 조선왕조의 통치 기반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12세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한명회, 권남, 정인지, 한확, 최항, 신숙주 등과 공모하여 단종 원년인 1453년 10월에 좌의정 김종서, 안평대군 이용, 영의정 황보인 등을 죽이고 그 일파를 귀양보낸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그는 단종 3년인 1455년 윤6월 11일에는 선양의 형식으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와 같이 세조가 불법으로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성승, 유응부, 권자신, 허조 등이 그해 겨울에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고, 이듬해 6월 1일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를 이용하여 세조와 세자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모두 체포, 처형되었다.

그 뒤 1년을 지나 세조 3년인 1457년 6월 21일에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에 안치하였다가. 그 해 10월에 목을 매어 죽게 하였다.

 

 

 

 

세조의 태실이야기

 

 

조선 제 7대 임금 세조의 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사 아래 태봉 정상에 있다. 여기는 세종의 17왕자와 손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세조는 세종대왕의 아들인 만큼 태실은 다른 왕자들의 태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지 8년이 되자 신하들이 주청했다. "관례에 따라 주상전하의 태실은 별도로 태봉을 만들어 모셔야 하나이다." 세조는 "형제가 태를 같이하였는데 어찌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 하며 불허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해서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금성대군과,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안평대군의 태실도 여기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세종대왕자태실, 세조태실비 [출처] 세조 태실, 태실로 알아보는 조선왕조작성자 태실연구소

 

세조가 즉위한 뒤 태실은 가봉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단지 태실비만 새롭게 만들어서 2기의 태실비가 남아 있다. 세조는 세자나 세손이 아닌 세종의 왕자였다. 때문에 태실은 세종의 다른 와자들 태실과 다른 것이 없는 동일한 형태이다. 개첨석과 낮은 구형의 중동석, 그리고 방형의 연엽대석으로 구성되어있다. 태실 바로 앞에 있는 비는 즉위 전에 조성된 것이다. 그 앞에 귀부와 이수를 갖춘 소형의 가봉비는 등극한 후 세워졌다. 세조가 등극한 뒤 세조의 충복이던 홍윤성이 글을 지어 태비 앞에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지금은 심하게 마모되어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화강앞으로 깎은 19기의 태실은 조선태실 의궤 형식으로 지하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백자로 된 태항아리를 넣었다. 태호 속에는 태주의 이름 및 생년월일을 음각한 지석을 넣었다. 지상에는 기단, 간석, 옥개의 형식을 갖춘 석조물을 안치하는 한편 각 왕자의 태실을 가리키는 표석을 세웠다. 세조의 태실도 다른 태실과 마찬가지다.

아기비의 명문에는


晉陽大君胎藏 皇明正統三年戊午年三月 十日立石
진양대군태장 황명정통삼년무오년삼월 십일입석

세종 20년(1438)이라고 각자 되었으며, 가봉비의 비문은 파손되어 판독할 수 없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세조의 태항아리는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