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이야기

연산군, 어머니를 위한 복수를... 갑자사화

by 무님 2020. 3. 10.
728x90

연산은 즉위 초기에 어머니 폐비 윤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쇠망치를 들지 않았다. 연산군은 냉철한 왕이였다. 대신 신하들이 왕권에 도전할 때마다 이를 핑계 삼아 어머니의 죽음을 주관하고 방관한 신하들을 처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1504년 갑자년이었다. 이때 또 한 차례의 피바람이 불게 되는데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의 원인은 연산군의 사치와 낭비로 국고가 바닥이 나자 그는 공신들의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려 하였는데, 이때 임사홍()은 연산군을 사주하여 공신배척의 음모를 꾸몄다. 이때 폐비윤씨의 생모 신씨()가 폐비의 폐출·사사의 경위를 임사홍에게 일러바쳤고, 임사홍은 이를 다시 연산군에게 밀고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연산군은 이 기회에 어머니 윤씨의 원한을 푸는 동시에 공신들을 탄압할 결심을 한 것이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되 신하들을 세 그룹으로 분류 했다.

첫째, 어머니의 죽음을 주관한 자들

둘째, 어머니의 죽음을 방관한 자들

셋째, 어머니의 죽음을 끝까지 말린 자들

어머니의 죽음을 막았던 사람들은 이미 성종 때 죽고 없었다. 즉, 연산군 주변의 대부분은 폐비 윤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세력과 방광한 세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성종 때 신하이자 대간 활동을 하였던 사림파 학자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 연산군의 한 차례 무오사화로 많은 피를 보았기에 두번째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결국, 연산군은 피를 볼수록 피에 굶주려 더 많은 피를 보지 않고는 못 견디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심지어 연산군은 신하들만 죽인 게 아닌 아버지 성종을 모셨던 후궁 중에서 폐비 윤씨의 죽음에 앞장섰던 후궁 엄씨와 장씨를 불러들인다. 그들은 연산군의 의붓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그녀들을 까만 두건으로 뒤집어 씌우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렸다. 그리고 그녀들의 자식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이년들이 간밤에 역적질한 년들이다. 너희가 처단하라!"

엄씨와 정씨의 아들들이 와서 보곤 깜깜하니, 꿈에도 자기 어머니인 줄 모르고 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중의 한 명은 자기 어머니인 줄 알고 차마 때리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통곡하였다.

 

'밤에 엄씨, 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연산군일군>

 

또한 야사에 의하면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를 찾아가 자기 어머니를 죽음에 몰게 하였다며 머리로 들이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고 한다.

 

연산군은 정·엄 두 숙의를 궁중에서 죽이고 그들의 소생을 귀양보냈다가 사사하였다. 그의 조모 인수대비도 정·엄 두 숙의와 한패라 하여 병상에서 난동을 부렸으며 그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폐비 윤씨를 복위시켜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는데, 응교 권달수()·이행() 등이 반대하자 권달수는 참형하고 이행은 귀양보냈다. 또한 윤씨의 폐출과 사사에 연관된 윤필상()·이극균()·성준()·이세좌()·권주()·김굉필()·이주() 등을 극형에 처하고, 이미 죽은 한치형()·한명회()·정창손()·어세겸()·심회()·이파()·정여창()·남효온() 등의 명신거유() 등을 부관참시()하였으며, 그들의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하였다. 이 외에도 홍귀달()·주계군() 등 수십명이 참혹한 화를 당하였다. 이렇게 갑자사화로 인해 죽거나 처벌받게 되는 사람들의 수가 어마어마 했으며 이는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이 일으킨 두번째 피바람이였다.

 

이 사건은 표면상 연산군이 생모 윤씨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벌인 살육으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그 이면에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연산군의 극에 달한 향락생활과 사치로 인해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자 이를 제어하려는 신하들과 연산군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신장하려는 신하들로 나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궁중세력()과 훈구 사림파 중심의 부중세력()으로 나뉘게 되었고, 임사홍이 이러한 구도를 적절하게 이용하면서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임사홍은 무오사화 때 당한 원한을 갚기 위해 연산군비 신씨의 오빠인 궁중세력의 신수근()을 끌어들여 부중세력의 훈구파와 무오사화 때 남은 선비들을 제거하기 위해 옥사를 꾸몄던 것이다.

 

 

갑자사화는 이후 국정과 문화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는데,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의 욕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그 이름이 빛나는 명신과 대학자·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화로 성종 때 양성한 많은 선비가 수난을 당하여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연산군의 비행과 폭정을 비난하는 한글 방서사건()이 발생하자 글을 아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옥사를 벌였고, 이를 계기로 한글서적을 불사르는 등 이른바 언문학대()까지 자행되어 이후 국문학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연산군의 계속된 실정은 새로운 정치질서를 모색하는 사람들에 의해 중종반정()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728x9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