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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연산군의 장녹수에 대한 사랑

by 무님 2020.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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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서 시집도 여러 번 가고 자식까지 둔 여인이 왕에게 발탁되어 궁궐에 들어갔다. 바로 장녹수(, ?~1506) 이야기이다. ‘연산군’ 하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인물 장녹수는 흥청()이라는 기생 출신에서 일약 후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30세의 나이에도 16살 꽃 다운 여인으로 보였다는 동안() 장녹수는 자식을 둔 후에도 춤과 노래를 배워 기생의 길로 나섰고, 궁중으로 뽑혀 들어와서는 연산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후궁이 되었다. 후궁이 된 장녹수는 연산군의 음탕한 삶과 비뚤어진 욕망을 부추기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갔다. 그녀는 무수한 금은보화와 전택() 등을 하사받았고, 연산군의 총애를 발판 삼아 정치를 좌지우지하였다. 모든 상과 벌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 후 장녹수는 반정 세력에 의해 제거 대상 1호로 떠올랐고, 참형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장녹수는 충청도 문의 현령()을 지낸 장한필()과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첩의 자녀였기 때문에 천민의 삶을 살아야 했다. 장녹수는 가난해서 시집을 여러 번 갔으며, 마지막에는 제안대군(: 예종의 둘째 아들)의 노비로 들어가 그곳에서 대군의 노비와 혼인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다.

이후에 그녀는 가무()를 익혀 이름을 떨쳤다. “얼굴은 중인() 정도를 넘지 못했다”는 표현으로 미루어 뛰어난 미색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나, 춤과 노래에 탁월한 능력을 겸비하여 소문이 자자했던 듯하다. 연산군은 그 소문을 듣고 그녀를 흥청()으로 뽑아 궁궐에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흥청은 연산군 대에 뽑았던 일 등급 기녀였다. 연산군은 기녀 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창기로서 얼굴이 예쁜 자들을 대궐 안으로 뽑아들였다. 전국의 개인 몸종과 지방의 관비, 그리고 심지어 양갓집 여성들까지 강제로 뽑아 올려졌다. 이때, 기생의 칭호를 ‘운평()’이라 했는데, 그 중에서도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특별한 기생을 승격시켜 맑은 기운을 일으킨다 하여 ‘흥청()’이라 불렀다. 흥청 중에서도 왕을 가까이 모신 자는 ‘지과흥청()’이라 하고, 왕과 동침한 자는 ‘천과흥청()’이라 구분하기도 했다

 

장녹수의 용모와 성격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는 [연산군일기]의 기록을 보면  '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므로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대군(大君)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좇았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 [연산군일기] 1502년(연산군 8) 11월 25일

 

궁궐에 들어 온 장녹수는 본격적으로 연산군의 마음을 흔들었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때로는 어린아이 같이 때로는 노예처럼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에게 깊이 빠졌는데, 화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보면 즉시 희색()을 띨 정도였다. 장녹수는 요사스러운 행동으로 연산군의 실정()에 기름을 부었다.

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녹수는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그녀는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으며, 각종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다. 그녀 덕분에 장녹수의 주인이었던 제안대군의 장인 김수말()은 계속해서 벼슬이 올라갔는데, 이는 “왕이 이때 한창 장녹수를 사랑하여 그 말이라면 모두 따랐기 때문에 특별히 승서()한 것이다”라는 실록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장녹수의 형부 김효손()도 함경도 전향 별감()에 제수되는 혜택을 받았다. 1502년(연산군 8)~1503년(연산군 9) 무렵에 이르러서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포악한 짓을 많이 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는 크게 근심하였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인 1502년(연산군 8)에 종4품의 숙원()으로 있었는데, 이듬해에는 종3품의 숙용()에까지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으로 승진한 셈이었다. 품계가 올라간 장녹수는 더욱 권력을 남용하였다. 장녹수는 궁 밖의 사가()를 재건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버리게 하였으며, 모습이 고운 두 여인을 시기하여 두 사람의 부자 형제()를 하루아침에 다 죽이게도 했다. 옥지화()라는 기녀는 장녹수의 치마를 한 번 잘못 밟았다가 참형을 당하기까지 했으니, 장녹수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녀의 위세를 믿고 장녹수의 하인들마저 행패를 부렸다. 동지중추부사 이병정()의 경우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했는데, 오히려 사재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쯤 되니 모두가 출세하기 위해 장녹수 앞에 줄을 서게 되었다. “무뢰()한 무리들이 장녹수에게 다투어 붙어 족친()이라고 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는 표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장녹수와 그 측근들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은 높아졌고, 결국 연산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506년(연산군 12) 8월 23일. 연산군은 후원에서 나인들과 잔치를 하다 시 한 수를 읊었다. “인생은 풀에 맺힌 이슬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은 것” 읊기를 마치자 연산군은 갑자기 눈물을 두어 줄 흘렸다. 다른 여인들은 몰래 서로 비웃었으나, 장녹수와 전비(, 숙용전씨, ?~1506)는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머금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와 전비의 등을 어루만지며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의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앞날을 예견하였던 것일까? 이날은 바로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열흘 전이었다. 장녹수는 연산군 폭정의 핵심이었던 만큼,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세력은 온갖 비난의 대상이었던 장녹수 체포에 나섰다. 반정군들에게 붙잡혀 군기시() 앞에 끌려온 장녹수는 참형()에 처해졌다. 길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은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장녹수가 빼앗아 쌓아두었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으며, 장녹수의 하인들은 전일에 기세를 믿고 남의 집 재산을 빼앗기도 하고 사람을 때려 다치게 했다는 죄목으로 형벌을 받았다. 그리고, 대간들은 기생인 장녹수와 전비의 사례를 들어 이를 경계하고 나라에 예법을 세울 것을 간하였다.

 

만약 연산군이 장녹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왕위에서 쫓겨나지 않을수도 있었을까? 아님 어머니 폐비 윤씨로 인한 분노는 어쩔 수 없는 폭군의 길을 걷게 했을까? 

 

연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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