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업적을 말하려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집현전의 학자들은 세종의 업적 중에 한글 창제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집현전이란 '현명한 학자들이 모인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말 그대로 유능한 인재들이 모여 공부를 하는 곳이였다.
세종은 집현전에 많은 관심과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다. 대표적으로 ‘사가독서’란 제도가 있는데 이것은
학사들에게 독서를 위한 휴가를 주어 업무를 잊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또한 학사들이 학문 연구에 집중할 수 있게 많은 책을 비치해 두었다.
집현전 학사들은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제도와 나라의 정책에 대해 연구했다.임금과 함께 나라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들이 한 학문 연구는 성리학, 역사, 지리, 의약, 천문 등의 발전을 가져왔다. 또한 우리 현실에 맞는 책을 만들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학문이나 생활양식에서 많은 부분 중국에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실생활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집현전 학사들은 우리나라에 맞도록 연구해 책을 발간했고,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 놓았다
집현전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책인 『칠정산』 같은 경우도 우리의 환경에 맞게 새로 만든 역법서였다. 칠정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 역법서예이다. 조선 시대 한양의 위도를 기준으로 해·달·화성·수성·목성·금성·토성 7개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이 서술되어 있다. 역법은 달력을 만드는 방법인데 천문학 지식이 없으면 감히 만들 수 없는 책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혼천의나 간의 같이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기구가 발명되자 우리만의 달력도 만들 수 있게 된다.
『농사직설』과 같은 농업서,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같은 의학서, 『고려사』와 『자치통감훈의』와 같은 역사서, 『팔도지리지』 같은 지리서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이 편찬된다.
『향약집성방』은 우리나라 약재에 대한 정보가 담긴 책으로 기존에는 중국의 약재들에 대한 정보가 전부였지만 이제는 우리 땅에서 나는 약재와 그 효능에 대해 알게 됐으니 병을 고치기도 한결 수월해질 수 있었다
과학이 발전하자 우리는 계절, 날짜, 날씨 등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는데 사실 이것은 조선의 근본인 농사의 발전과도 큰 관계가 있다. 세종은 이렇게 농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싶었던 거였다
『농사직설』도 이러한 소망을 담아 만든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땅을 기름지게 잘 관리하는 방법이나, 전국 각지의 농사 기술을 조사해서 좋은 방법들을 모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로 인해 곡식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는 좋은 결과를 낳게 되었지요.
집현전 학자로는
<강희안 (姜希顔) , 1417 ~ 1464>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정이라 일컬어졌으며,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한다
<정인지 (鄭麟趾) , 1396 ~ 1478>
조선의 문신, 세종의 총애를 받아 예조와 이조의 정랑을 거쳐 집현전 학사로 등용되고 집현전 응교에 이어
집현전 직제학에 오른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승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국. 예문과 대제학으로
"사륜요집" 을 편찬 , "치평요람"을 찬진함. 예조 판서를 거쳐 1448년 이조 판서가 되어 삼남지방의 전품을
심사하여 토지의 등급을 정함, 그 후 계유정난에 수양대군을 도와 우의정에 승진, 정난공신 1등으로 하동
부원군 등 여러 공신에 봉해졌으며 조선 초기 대표적 학자의 한 사람으로 천문, 역법, 아악 등에 관한 많은 책을 편찬했고, 김종서 등과 함께 "고려사" 를 찬수함, 한편 세종을 도와 성삼문, 신숙자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컸으며 권 제, 안 지 등과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박팽년 (朴彭年) , 1417 ~ 1456>
성삼문과 함께 세종의 총애를 받은 학자로, 1456년 형조 참판으로서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김질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발각, 체포된후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를
끝내 거절하고 사형을 당했다
<성삼문 (成三問) , 1418 ~ 1456>
집현전 학사로서 정음청에서 학자들과 함께 한글의 창제를 앞두고 명나라의 한림 학사 황찬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며 음운을 질의, 다시 명나라에 여러번 건너가 음운과 교장 제도를 연구한 끝에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하게 하였지만, 계유정난 때 단종복위에 가담했던 김질의 밀고로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과 함께 체포
되어 친국을 받고, 군기감 앞에서 거열의 극형을 받았다
<신숙주 (申叔舟) , 1417 ~ 1475>
조선의 문신. 1443년 통신사 변효문의 서장관이 되어 일본에 가서 시명을 떨치고, 귀국 도중 쓰시마도에서
계해약조를 체결, 그 후 집현전의 수찬을 지내면서 세종을 도와 성삼문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큰 공을 세
워 세종에게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소장 학자였으나,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가담해 여러 직책을 맡으며
도와준 점에서 후세에 비난을 받고 있다
<이 개 (李 塏) , 1417 ~ 1456>
사육신의 한 사람. 1441년 저작랑으로 "명황계감"의 편찬에 참여, 훈민정음의 창제에도 참여, 계유정난 때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죽음. 본래 세조와도 친교가 있어 진상을 밝히도록 강요
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처형당하였습니다. 시문이 청절하고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최 항 (崔 沆) , ? ~ 1474>
세종때의 문신으로 알성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 부수찬이 되어 정인지,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
에 참여, 이어 "동국정운" , "훈민정음해례" , "용비어천가보수" 등을 찬진함. 우사간대부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 등 여러 공신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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