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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집현전 학자 신숙주

by 무님 2020.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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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의 본관은 고령()으로 자는 범옹(), 호는 보한재() 또는 희현당(), 시호는 문충()이다. 아버지는 공조참판(종2품)을 지낸 신장(, 1382~1433)이고, 어머니는 지성주사() 정유()의 딸이다.

참판이라는 벼슬이 보여주듯 신장은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그의 졸기에는 그가 인품이 온후하고 사장() 과 초서ㆍ예서에 뛰어났지만,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단점이었다고 적혀 있다. 그의 능력을 아낀 세종이 절주를 당부했지만, 과음은 결국 그의 사인()이 되었다(세종 15년 2월 8일). 그러니까 신숙주는 16세 때 아버지를 여읜 것이다.

‘숙’이라는 이름이 나타내듯이, 신숙주는 신맹주(), 신중주(), 신송주(), 신말주()로 이어지는 5형제 중 셋째였다. 신숙주는 젊은 시절부터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21세 때인 1438년(세종 20) 생원ㆍ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문과에서 3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한 것이다. 1441년에는 집현전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442년 서장관으로 뽑혀 국가사신으로 일본에 갔다.

또한 신숙주는 《훈민정음》 창제시 참가하여 공적을 쌓았다. 중국음을 훈민정음인 한글로 표기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유배중이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으러 요동을 열세차례나 내왕하였는데, 언어학자인 황찬은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하였다고 한다.

 

1450년(세종 32) 중국에서 예겸()과 사마순()이 사신으로 왔을 때 그들을 접대하면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발휘한 것도 특기할만하다. 예겸은 자신이 지은 [설제등루부()]에 신숙주가 걸어가면서 운을 맞춰 화답하자 “굴원()과 송옥 () 같다”면서 감탄했다. 이때는 성삼문(, 1418~1456)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그는 신숙주보다 한 살 적었지만 문과 급제는 한 해 빨랐다. 그 뒤 전혀 다른 인생의 궤적을 밟은 두 사람이었지만, 그 경력과 나이는 매우 흡사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전기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신숙주도 그러했다. 그에게 가장 큰 전기를 제공한 사람은 얼마 뒤 세조로 등극하는 수양대군(, 1417~1468)이었다. 두 사람은 동갑이었다.

그전에도 서로 알고 일정한 교류는 있었겠지만, 운명이라고 말할 만큼 친밀도와 중요성이 급증한 계기는 35세 때인 1452년(문종 2)이었다. 그때 대군은 사은사(使)로 중국에 파견되기 직전이었다. 그 사행은 야심이 큰 대군을 중앙에서 일정하게 격리시키려는 좌천의 의미가 큰 조처였다. 다시 말해서 수양대군에게는 어떤 결단이 필요한 중대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 뒤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과 그의 가장 핵심적인 신하가 되는 신숙주의 만남을 실록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8월 10일 세조는 정수충()이라는 인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신숙주가 집 앞을 지나갔다. 세조는 “신 수찬()”이라고 그를 불렀고 집으로 초대해 술을 마셨다. 그때 신숙주는 수찬이 아니라 직제학이었지만, 세조가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은 그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두 사람은 의미 깊은 대화를 나눴다. 세조는 “옛 친구를 어째서 찾지 않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지 오래였다. 사람이 다른 일에는 목숨을 아끼더라도 사직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신숙주는 “장부가 아녀자의 손 안에서 죽는다면 ‘집에서 세상 일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만합니다”고 화답했다. 세조는 즉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중국으로 갑시다.”(단종 즉위년 8월 10일)

이 짧은 대화는, 세조와 한명회()의 만남과 함께,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그 뒤 서장관으로 수행한 사행에서 세조와 신숙주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당연히 흉금을 터놓고 국가의 대사를 논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강구했던 ‘구국의 방안’들은 한 해 뒤인 1453년(단종 1) 10월 10일 계유정난으로 구체화되었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신숙주는 외직에 나가 있었지만, 세조가 정권을 장악한 이후 그야말로 화려한 출세를 거듭했다. 그는 1454년(단종 2) 도승지를 시작으로 병조판서, 좌우찬성, 대사성을 거쳐 40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으며(1457년, 세조 3) 5년 뒤에는 최고의 지위인 영의정에 임명되었다(1462년, 세조 8).

 

1464년에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사직한 적이 있으며, 1467년에 다시 예조를 겸판하였다.

이듬해 예종이 즉위함에 유명()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원상()으로 서무를 참결()하고, 같은해 이른바 남이()의 옥사를 처리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겨울에 예종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에게 후사()의 택정을 서두를 것을 건의하여 대통()의 승계에 공이 컸다.

성종이 즉위함에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의 호를 받고, 영의정에 다시 임명되었다. 노병()을 이유로 여러 차례 사직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고, 1472년(성종 3)에는 《세조실록》 ·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세조 때부터 작업을 해온 《동국통감》의 편찬을 성종의 명에 의하여 그의 집에서 총관하였다. 또 세조 때 편찬하도록 명을 받은 《국조오례의》의 개찬 · 산정()을 위임받아 완성시켰다. 여러 나라의 음운()에 밝았던 그는 여러 역서()를 편찬하였으며, 또 일본 · 여진의 산천 요해()를 표시한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동제국기()》를 지어 일본의 정치세력들의 강약, 병력의 다소, 영역의 원근, 풍속의 이동(), 사선() 내왕의 절차, 우리측 관궤()의 형식 등을 모두 기록하여 일본과의 교빙()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75년(성종 6)에 일생을 마쳤다.

 

세상 사람들이 신숙주의 절개가 녹두나물처럼 잘 변한다고 하여 숙주나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처럼 신숙주는 배신자였지만 그가 남긴 업적들을 생각해 본다면 마냥 나쁜 인물로만은 평가할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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