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하면 단연 사림(士林)을 어엿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시킨 인물이고, 김종직을 비롯한 이들을 중용했으며, 대간(臺諫) 세력을 크게 키워 조선식 비판 정치를 활성화시킨 인물로 유명하지만, 정작 자신이 키운 대간 권력에 의해 거의 죽기 일보 직전으로까지 스트레스를 받았다.
조선 초만 해도 대간은 미래의 대신들이고, 대신들은 과거의 대간들로, 이해 관계가 상당 부분 일치해 정계와 언론계가 유착해서 초장부터 싹이 노랬는데, 세조 때는 정청(政廳)에서 관이 벗겨지고 상투를 잡혀 끌려 나가는 등 대우가 매우 처참해서, 거의 구실을 못 하던 상황이었다. 이에 성종은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여 대간을 채웠고, 유명무실해진 사헌부, 사간원의 권력을 회복시키며, 새로이 홍문관에게도 비판 기능을 부여하여 비판을 활성화시켰다. 초기에는 대간이 대신들을 견제하며 깨끗한 정치를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간들이 하는 언행이, 성종이 대인배만 아니었어도 거의 살아남기 힘들 수준의 것들이 대단히 많았다. 대간들의 자질이 부족하다보니 간언의 내용이 너무나 비논리적이고 불합리한,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변질되어버렸다.
활을 쏘거나 시를 쓰면 취미에 빠져 나랏일 팽개칠 징조라고 태클, 창경궁에 구리로 수조를 만들었더니, '당신 사치하심!' 라고 태클을 걸었다. 그래서 구리 수조를 뜯어내고 돌로 만들었더니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 또 성종의 무신(武臣) 등용 정책에 '온 조정을 군인들로 채울 생각인가?' 라고 태클을 걸어 무신 등용 정책은 대실패로 돌아갔고, 중종반정의 주도자인 박원종을 마지막으로, 무신 출신으로 힘을 썼던 사람들은 반정 공신이라서, 신경진까지 합쳐도 없다… 거기에 중종 시기, 박영문 신윤무 등이 무신의 난을 꾸몄다는 혐의로 죽으면서 무신의 힘은 안드로메다로… 또 역관, 의관에게 동반, 서반 직을 주려 했더니, '위 아래도 없는 왕이구만' 하고 태클을…
심지어 말년에 다리 셋 달린 닭이 태어나자, "요물이 태어나는 것은 왕이 여자의 말을 들어 정치를 한 탓이라고 옛말에 있으니, 왕이 여자의 말을 들었구나!" 라고 몰려와서 왕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성종이 "이 미친 놈들이 미신을 가지고 왕을 핍박하네? 내가 잘못을 했어야 반성을 하지, 하지도 않은 것 가지고 반성을 하라니 어쩌라고?" 라고 항변하자, 대간들이 "하라는 반성은 안 하고 어디서 말대꾸예요?!"라며 막무가내로 물러서지 않았다. 성종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오냐, 요즘의 재이(災異)는 다 내가 불러들였다, 이것들아!"라고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비슷한 시기, 성종이 대간들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자꾸 거절하자, 대사헌(大司憲)이 "요즘 우리 말이면 다 물리치네?" 라고 불평을 했다나?
영조의 경우에는, "아니 되옵니다" 한 마디만 상소에 있어도, "저 XX 당장 섬으로 유배 보내버렷!"이라고 외치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성종은 짜증은 낼지언정, "오냐, 내가 무조건 잘못했다"면서 끝내 양보해버렸다.
그래도 유학적 수양을 잘 갖춘 성종이었기에, 대간들의 말을 수용 않는 경우는 있었어도 그들을 처벌하지는 않았기에, 대간들은 아무 말이나 막 하면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대간의 이런 행동은 분명 정도(程度)를 넘은 것이었고, 이후 연산군의 철퇴를 맞게 된다. 특히 성종에게 제일 딱딱거렸던 정성근 등은 끔살당한다.
나중에 연산군은 봄 추위가 심하자 "예전에는 봄에 추위가 오면 임금 탓이라고 하지 않던가?" 라고 비꼬듯 말한 적이 있다. 성종 시기 대간의 행태에 대해 담아둔 것이 많았다는 대표적인 증거 중 하나다.
사림의 수장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유명한 사건이며 이후 큰 비극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조선 성종 때 학자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중국 초(楚) 나라의 항우(項羽)가 의제(義帝, 초나라 희왕)를 죽여 폐위시킨 사건에 대해 의제의 죽음을 조위하여 쓴 글로,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을 빗대어 지은 글이다. 이것은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함으로써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예종, 성종, 연산군 등은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세조의 왕위 찬탈에 참가한 훈구 대신들 역시 비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조의제문 (弔義帝文)
정축 10월 어느 날
나는 밀성 으로부터 경산 으로 향하여
답계역에서 숙박하는데
꿈에 신(神)이 칠장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나라 회왕인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 에게 살해 되어 빈강(郴江)에 잠겼다.”
그래서 문득 보이지 아니하였다.
나는 꿈을 깨어 놀라며 이르기를
“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나는 동이 사람으로
지역간 서로 떨어진 거리가
만여 리가 될 뿐만 아니며
세대의 선후도 또한 천 년이 넘는데
꿈속에 와서 감응하니 이것이 무슨 상서로움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어찌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이것을 알 수 없으니 마침내 글을 지어 조문한다.
하늘이 사물의 법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어느 누가 사대와 오상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라서 풍부하고 오랑캐라서 인색한 바 아니니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겠는가
그러기에 나는 오랑캐이요
또 천 년을 뒤졌건만 삼가 초 회왕을 조문한다
옛날 조룡 이 아각을 가지고 노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어라
비록 전유와 추애일지라도 어찌 보전하겠는가
그물 벗을 생각에 급급했으니
당시 육국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편맹과 짝이 되었다오.
항량(項梁)은 남쪽 나라의 장군의 자손으로
어호(魚狐)를 쪼치 일을 일으켰네.
왕위를 얻되 백성의 소망에 따랐어라
끊어졌던 웅역(熊繹)의 제사를 보존하였도다.
건부(乾符)를 쥐고 임금이 됨이여
천하에는 진실로 미씨보다 큰 것이 없었다.
장자(長者)를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역시 족히 그 인의(仁義)를 보았다.
양흔낭탐이
관군(冠軍)을 마음대로 평정하였구나
어찌 잡아다가 제부(齊斧)에 기름칠 아니했는고.
오호라!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아니함이여
나는 왕에게 더욱 두렵게 여겼어라
반서(反噬)를 당하여 해석(醢腊)이 됨이여
과연 하늘의 운수가 정상이 아니었구나
빈의 산이 우뚝하여 하늘에 닿음에야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녁을 향하고
빈의 물은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른다.
천지가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할까
넋은 지금도 표탕하다.
내 마음이 금석을 꿰뚫음이여
왕이 문득 꿈속에 임하였구나
자양의 노필을 따라감이여
생각이 초조하여 흠흠하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음이어
바라옵컨데 영령은 와서 제사음식을 받으소서.
이에 이극돈, 유자관 등 훈구 대신들은 김종직이 죽은 후 사관(史官)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이 조의제문을 빌미로 1498년 연산군을 부추겨 사림파에게 보복을 가하였는데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士禍)다. 무오사화의 결과,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20여 명이 넘는 사림파 관료들이 목숨을 잃거나 처벌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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