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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문종실록

by 무님 2020.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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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실록>은 문종 즉위년 1450년 2월 22일부터 문종 2년인 1452년 5월 13일까지 약 2년 4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텨체로 수록한 사서이다. 정신 이름은 <문종공순대왕실록>이며, 모두 ㅂ3권6책이었으나 1권은 결본이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문종실록>은 단종 원년인 1453년 정월 6일에 황보인 등이 편찬을 청하여 시작하게 되었다. 곧 춘추관에 명하여 문종 대의 공사 기록과 사초를 수납케 하고 편찬을 시작하여 세조 원년 1455년 11월에 편찬을 마쳤다. 다음달 12월 19일에 <문종실록>을 실록각에 봉인하고 수찬관들을 의정부에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문종실록>은 편찬한 뒤 실록각에 봉이되어 오다가 성종 4년인 1473년 6월 8일 <세종실록>, <세조실록>, <예종실록>과 함께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춘추관과 충주, 전주, 성주의 사대 사고에 봉인하였다. 그 뒤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 왜란 때에 전주 사고본을 제외한 다른 사고본들은 모두 불타 버렸다. 선조 36년인 1603년 전주 사고본을 대본으로 하여 정본 3건과 초보(교정본) 1건을 목활자로 다시 인쇄하였다. 그의 능은 현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에 있으며, 현덕왕후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문종실록>의 내용~~

문종의 이름은 향, 자는 휘지로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큰 아들이다. 세종3년인 1421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450년 2월 세종의 뒤를 이어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문종은 왕위에 있은 지 겨우 2년 4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짧은 기간에 그는 방대한 <세종실록> 총 163권을 편찬시키고,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에게 총재 감수토록 하였다.

<세종실록>은 그의 재위기간에 완결되지 못하였으나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그 외에도 <동국병감>과 세종이 제작한 <연향아악보>등을 간행하였으며,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 139권과 편년체인 <고려사절요> 35권을 간행하여 중외에 반포하고 각 사고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문종은 서울의 도성을 비롯하여 경기도. 충청도.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전라도. 경상도 등 각도의 주요한 읍성들을 모두 수축하거나 혹은 개수하였으며, 변경인 의주, 용천, 삭주 등의 읍성들과 온성. 종성 등지의 성을 새로 수축하거나 보수하여, 국경과 국내의 주요 읍성들을 모두 개축하였다.

<문종실록>은 편집 도중에 계유정난이 일어나 황보인. 김종서 등 집권 대신들이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편찬의 실권은 수양대군의 일파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문종실록>의 기사 중에는 신빙성이 낮은 것이 많다. <문종실록> 13권 중에서 현존하는 것은 12권뿐이고, 제 11권은 결본으로 되어 있다.

 

현존하는 『문종실록』은 문종 1년 12월과 다음해 1월의 두 달 분 기록에 해당하는 제11권이 결본(缺本)이다. 이에 대해 1600년(선조 33) 8월, 예문관 대교(待敎)로 당시 묘향산에 가서 실록을 살핀 권태일(權泰一)은 처음으로 『문종실록』의 착오를 발견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성주사고·충주사고가 불타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남아 이것을 묘향산으로 옮겼는데, 이 전주사고본은 『문종실록』 11권의 경우 표지와 내용이 달랐다는 것이다. 즉, 표지에는 11권이라 되어 있는데 그 안의 내용은 9권이어서 실제로는 11권이 없고 9권이 중첩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권태일은 인쇄하여 각 사고에 나누어 보관할 때 필경 착오가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인쇄한 후 제본하는 과정에서 표지를 잘못 붙여 생겨난 착오분이 전주사고에 보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초 성종 때에 인쇄 봉안한 이후로 이러한 잘못을 모르고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현재 전해지는 실록관계 각종 형지안(形止案)으로 추측해볼 때, 임진왜란 이후 실록이 재 출판한 때인 선조 39년 사이에 없어진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문종의 태실이야기

 

조선의 5대 임금 문종의 태실은 경북 예천군 상리면 태봉 정상에 있었다. 명봉사는 태실의 안위와 수호를 맡은 수호 사찰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태항아리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간 뒤 태실은 완전히 파괴되고 흩어졌다. 일제강점기에 발굴되고 비석만 남은 것을 사찰측에서 옮겨 놓았다. 이후 문종대왕 태실비는 1984년 12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87호로 지정되었다.

 

문종의 태실

 

비의 규모는 전체 높이가 246cm, 비신 높이 113cm, 귀부 61cm, 대좌 높이 12cm이다.
이 비는 귀부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올려 놓은 일반형으로 지대석과 쉬부가 한돌이 되어 있다. 귀두는 용머리 같이 조각되어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다. 이수는 방형으로 전면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 있는 것을 양각했다 몸체에 비해 처리 기법이 둔중해 보이나, 전체적인 구성과 조각 솜씨는 매우 섬세하다.

전면 : 文宗大王胎室 후면 : 崇禎紀元後一百八十乙卯九月二十午日建
전면 : 문종대왕태실, 후면:숭정기원후 일백팔십을묘구월이십오일건

태실비의 비명을 살펴보면, 으로 이 비의 건립 연대가 영조 11년(1735년)임을 알수 있다.

 

문종 태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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