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은 조선왕조 제4대 왕 세종의 재위기간인 1418년 8월 ~ 1450년 2월, 31년 7개우러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세종장헌대왕실록>이며, 모두 163권 15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ㅣ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세종실록>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1개월 뒤인 문종 2년인 1452년 3월 22일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단종2년인 1454년 3월에 완성되었는데, 2년 1개월이 걸렸다. 당시 편찬의 총재관은 처음에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였으나,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일어난 계유정난으로 황보인 . 김종서가 죽임을 당하자, 최후의 감수는 정인지 혼자 담당하였다.
<세종실록>은 그 분량이 방대하므로 처음에는 한 벌만 등초하여 춘추관에 보관하였다. 세조 12년인 1466년에 양성지의 건의로, 이미 편찬된 <문종실록>과 활자로 인쇠하기 시작하여, 서종 3년인 1472년에 완료되었다. 실록이 활자로 인쇄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당시 발간한 것은 3부로서 충주. 전주. 성주의 세 사고에 각 1부씩 봉인하고, 초봉은 춘추관에 보관케 하였다. 그 뒤 임진 왜란으로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다른 사고에 수장하였던 실록이 모두 없어지고 오직 전주 사고본만이 남게 되었다. 이를 선조 말년부터 다시 인쇄하여, 재난을 피할 수 있는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또는 적상산, 마니산 등에 설치된 여러 사고에 한벌씩 봉인케 하였다.
세종은 재위 32년간에 걸친 사료가 매우 방대하였으므로 그 실록 편찬에는 육방으로 나누어 분담 찬수케 하였다. 세종의 시호는 장헌, 존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묘호는 세종이며, 능호는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다.
<세종실록>의 내용은~~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의 대의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빘나는 업적이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직접 창제를 지휘하였고, 집현전의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선로. 이개 등 소장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싿. 세종 14년부터 간의대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그리기ㅗ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 혼상. 규표와 방위 지정표인 정방안 등이 설치되어 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고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측우기는 세종 23년 8월에 발명되었고, 이듬해 5월에 개량. 완성되었다. 1403년에 주조된 청동활자인 계미자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로 경자지를 만들었고, 세종 16년에는 더욱 정교한 갑인자를 주조하였다. 세종 18년에는납활자인 병진자가 주조됨에 따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이 완성되었다.
세종 때는 화보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어 완구. 소화포. 철제탄화. 화포전. 화초 등이 발명되었다. 세종 26년에 화포주조소를 짓게 해 뛰어난 성능을 가진 화포를 만들어 냈고, 이에 따라 이듬해는 화포를 전면 개주하였다
세종 때에는 중구의 농업서적인 <농상집요>, <사시찬요> 등과 우리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 등의 농업서적을 통해 농업기술을 계몽하고 권장하였다. 의약서로는 <향약채집월령>,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이 편찬되었다.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세종 대의 큰 업적이다.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를 보내 육진을 개척하게 하였고 압록강 방면에는 사군을 설치해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영토로 편임하였다.
세종 1년에는 이종무 등네게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반면 세종 8년에는 삼포를 개항하고, 세종 25년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세종의 태실 이야기
조선의 4대 임금 세종대왕 태실은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소곡산에 있다.
일명 태봉이라고도 한다. 이 태실지는 세종이 임금이 왕위에 오르던 해인 1418년 곤양군의 전신인 옛 곤명현 소곡산이 전국에서 가장 좋은 길지라 해서 태를 이곳에 안치했다. 즉위년에 조성된 가봉 태실에는 돌난간이 설치되지 않고, 나무 난간이 만들어졌다. 왕의 태실 대부분은 석난간으로 되어 있다. 허나 세종대왕은 땅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나무 난간을 만들라고 어명을 내렸다 한다. 왕의 태실은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부분이기도 한데 나무 난간을 사용하라 어명을 내렸다고 하니, 세종대왕이 어떠한 왕이었는지는 이러한 부분에서도 알 수 있다. 이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나무난간은 석난간으로 바뀌어 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세종 1년(1419년)에 곤명현은 남해현과 합해서 곤남군으로 승격시켰다.
이 곤남군은 이후 곤양군으로 개칭되어 조선왕조 말기까지 지속된다.
세종대왕은 태실은 정유재란 때 왜적에 의해 도굴, 파손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리하여 선조 34년(1601년) 3월에 대대적으로 수리되었다. 영조 10년(1734년)에는 태실비를 세우고 <태실수개의궤:수리한 기록문서> 를 남겼다.
태실의 구조는 '태실 의궤'에 있는 '태실석물 배설도'에 나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국유지이던 태실의 임야는 모두 민간인에게 팔렸다. 당시 세종대와의 태실은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갔다.
현재 원래 태실지에는 민간인 묘지가 들어서 있다. 이곳 태실지는 원래 태실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당시의 조형물인 태실비와 태항아리를 안장하는 중동석, 상개연엽석, 돌난간, 지대석, 주춧돌, 팔각대 등 석물 22점을 산자락에 한데 모아두고 있다. 1975년 2월 12일 지방기념물로 지정해서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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