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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7대 왕 세조 - 이유

by 무님 2020.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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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4대 세종은 1417년 세종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휘()는 유(), 자는 수지(), 시호는 혜장()이다. 윤번()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왕위에 등극하여 정희왕후()가 되었다. 형인 문종에 비해 학문보다 무예()에 능하고 병서()에 밝았으며, 진평대군()·함평대군()·진양대군()이라 칭하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홍위(단종)가 즉위하자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한 야망을 가지게 되었다.

 

단종 재위시인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적이었던 김종서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계유정란은 수양대군은 권람()·한명회()·홍달손()·양정() 등 30여 인의 무인세력을 휘하에 두고 왕권을 찬탈하려는 계획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1452년 10월 수양대군은 조선의 국왕이 되기 위해서는 명나라로 부터 환심을 얻어야 했으며 그 목적으로 사은사를 자처하여 명을 다녀왔다. 1453년(단종 1) 10월 10일 무사들을 이끌고 김종서를 살해한 뒤 사후에 왕에게 알리고 단종을 압박하여 왕명으로 중신들을 소집, 영의정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찬성()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이고 우의정 정분() 등을 유배시켰다. 그리고 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뒤 사사()하였다. 역사에서는 이를 계유정란()이라고 불렀다.그리고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하였으며 1445년 윤6월 11일 조카 단종의 양위로 왕이 된다.

 

형식적으로는 양위였지만, 실상은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의 세력이 무서워 내어준 것이므로 찬탈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넘긴 사람은 조선 최고의 충신 성삼문이었다고 한다. 성삼문은 1445년에 단종을 보필하는 승지의 자리에 있었는데 성삼문은 옥새를 건네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456년 세조는 왕위에 오른 후 단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궁궐이 아닌 금성대군의 집에 살게 했다 그리고 단종의 거처에 군사를 배치해 경계와 감시까지 하였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재위기간 중에도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이른바 사육신() 사건을 비롯하여 금성대군이 주동한 단종 복위운동과 이시애(李施愛)의 난 등 즉위 초반에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난관들은 대체로 그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일어난 것들이었다. 왕위찬탈자라는 명분상의 약점은 언제든지 단종의 복위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특히 집현전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들은 혈기왕성한 유학자들답게 명분을 중히 여겼다. 게다가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국주도권이 세조의 측근공신들에게 넘어가면서 소외되었다.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중심인물은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우익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연려실기술] 단종조 고사본말)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음모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세조는 김질과 성삼문을 불러 들였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함이라,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 성삼문이 이 일을 하는 것은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백성은 두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

인두질에 성삼문은 도모하던 동지들의 이름을 대었다. 이에 따라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김문기 등 이른바 사육신들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지지고 팔을 잘라내는 잔학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왕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당했다. 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단근질)을 당하였고, 후에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이에 앞서 세조는 성삼문과 거사를 도모한 박팽년을 평소 총애하고 있었다. 조용히 사람을 보내 “네가 내게 항복하고 같이 역모를 안 했다고 하면 살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박팽년이 웃고 대답하지 않으며, 세조를 부를 때는 반드시 ‘나으리’라고 하였다. 세조가 화를 내며 그 입을 마구 때리게 하고 말하기를, “네가 이미 신이라 일컬었고 내게서 녹을 먹었으니, 지금 비록 신이라 일컫지 않더라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박팽년은 “내가 상왕의 신하로 충청 감사가 되었고, 장계에도 나으리에게 한 번도 신이라 일컫지 않았으며, 녹도 먹지 않았다.”고 하였다. 실제로 그 장계를 대조하여 보니, 과연 신()자는 하나도 없었고 신자 대신에 거()자로 썼으며 녹은 받아서 먹지 않고 창고에 쌓아 두었다고 한다.

불발로 끝난 단종 복위사건은 단종에게는 오히려 악재로 작용했다. 이 사건으로 단종은 상왕에서 쫒겨나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또한 문종의 비였던 현덕왕후 권씨는 사후에 폐비되고 무덤이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다. 사육신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처나 딸들은 공신들의 여종으로 주어졌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은 박종우에게 주어졌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정인지에게 주어졌다.

사육신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생육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육신은 이미 죽었지만 살아남은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이 [사육신전]을 지어 세상에 유포시킴으로써 이들의 이름이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은둔으로써 항거했던 여섯 명의 선비가 있었는데 이들은 목숨을 내놓고 저항했던 사육신과 대비된다는 의미에서 생육신이라 하였다.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이 그들인데 이들은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키다 세상을 떠났다.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르기에 명분이 부족 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문무에 뛰어나고 야망이 큰 사람이었다. 만약 수양대군이 세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세자에 있어더라면 그는 그의 할아버지인 태종만큼이나 권력을 휘어잡은 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기의 꿈을 펼치기엔 수양대군의 자리는 너무 작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세조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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