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 왕 단종을 말할때면 비운의 왕이란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왕 단종의 험난했던 왕의 길과 소년의 나이 상왕이 되고 상왕의 자리에서 노원군으로 격하되어 유배길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그 유배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 하고 죽어야 했던 짧은 생을 참으로 힘들게 마감했던 그러기에 한없이 가엽은 왕이 아닐 수 없다.
단종과 그 정부인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 영도교에서 이별을 한다. 그 다리는 단종이 영영 돌아오지 못한 이별을 했다 하여 영영이별교가 된다. 여기서부터 금부도사 왕방연은 주민들의 눈을 피해 가까운 한강의 나루터로 가 이천의 천서리까지 배를 이용한다. 거기서 장호원, 원주, 주천, 제천을 거쳐 단 닷새 만에 영월 청령포로 압송한다.
당시 단종의 유배 호송인 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영월에 압송하고 청령포에 유치한 이후 건너편 서강변에 서서 남긴 시는 이제 유적 시비에 새겨져 홀로 지켜보고 있다. 이러한 호송은 역사적으로도 드문 기록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반적인 경우는 유람을 가는지 유배를 가는지 모를 정도였는데 단종의 유배길은 사람조차 보지 못한 길을 택하고 뛰어가듯 갔던 것은 세조 측의 정난공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는 일에 정당성이 부족하여 매우 이례적인 호송을 한 것으로 보인다.
호송을 담당했던 왕방연은 자신의 운명을 잘 기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단종을 영월로 유배하는 길에 책임자가 되고 또 마침내 사약을 가지고 사형집행관이 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세조 일행을 제외하고 단종을 영월에 유배하여 죽임은 아무도 옳다고 생각하지 아니한 일이었다. 그가 말한 “내 마음 둘 데 없다”는 표현은 역사에 기록할 데 없는 자신의 운명을 예측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숙부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은 멀고 먼 영월 땅으로 유배길에 오른다. 창덕궁 대조전에서 유배교서를 받고 1456년 음력 6월 22일 돈화문을 출발해 한강나루에서 남한강 뱃길을 따라 양주, 광주, 양평, 여주, 원주를 거쳐 닷새 만에 영월 땅 주천에 당도했다. 주천에 있는 마을의 우물에서 물 한 모금 마시며 갈증을 푼 뒤 공순원 주막에서 유배길 행차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그때 단종이 목을 축인 우물이 지금도 ‘어음정’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공순원 주막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단종의 유배 행렬은 험준한 군등치를 넘고 다시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배일치에 힘겹게 올랐다. 배일치 고갯마루에 이른 단종은 자신을 위해 죽어간 사육신을 떠올리며 궁궐이 있는 서쪽을 향해 고마운 마음으로 큰절을 했다. 지금 배일치 고갯마루에는 절을 하는 단종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배일치를 넘고 물길을 돌아 도착한 곳이 청령포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이레가 걸렸다. 청령포는 3면이 서강으로 둘러싸여 반도를 이루고, 나머지 한 면은 육육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어 육지이면서도 외딴 섬이나 다름없다. 나룻배가 아니고서는 드나들 방법이 없는 천혜의 유배지인 이곳에서 단종은 두 달간 유배생활을 했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는 그의 슬픔을 더하게 하였습니다. 육지 중 섬에 갖혀 오도 갈수 없으며 홀로 외로움에 사무쳤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절벽과 강으로 둘러싸인 외로운 감옥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청령포까지 3분 남짓 걸린다. 맑은 강물과 빽빽하게 늘어선 소나무가 유배지가 아닌 유원지 같은 느낌을 준다. 어디까지나 청령포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곳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던 단종에게는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을 터. 배에서 내려 소나무 숲에 발을 디디면 단종을 따라 온 궁녀와 관노가 생활하던 행랑채가 보인다. 그 옆에 단종어소가 있다.
처음 단종이 유배되어 왔을 때에는 따르는 궁녀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단종이 청령포에 도착한 지 5일이 지나자 단종을 섬기던 궁녀들 중에서 4명은 단종비 정순왕후를 따르고 6명은 영월까지 먼 길을 따라왔다. 당시 영의정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궁녀들이 따라가 노산군을 시종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세조에게 누차 고했으나 세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한다.
단종어소는 육간대청처럼 큰 기와집이다.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이처럼 좋은 집에서 기거했다는 것이 어쩐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홍수로 떠내려 간 건물을 1996년에 새로 지으면서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올린 느낌이다. 단종어소 방 안에는 단종의 유배생활을 짐작하게 해주는 인형과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임금의 거처를 지켜 본 소나무들
단종어소 앞에 ‘단묘재본부시유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단묘유지비가 있다. 단종이 기거했던 옛 집터가 있었음을 표시하는 비다. 본래 있던 건물이 소실되자 영조 39년(1763) 원주관아에서 어소가 있던 위치를 알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 단종어소에는 특이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담장 밖에서 단종어소를 향해 절을 하듯 굽은 모양새가 눈길을 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장릉에 묻은 엄흥도(嚴興道, ?~?)의 충절을 기려 ‘엄흥도소나무’라고 불린다.
단종어소를 나오면 수령 600년으로 추정되는 관음송이 웅장하게 서 있다. 키가 30m에 달하는 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소나무 중 가장 키가 크다. 아랫부분에서 두 줄기가 하늘로 높이 뻗어 오른 모습이 품위 있고 자태가 아름답다. 관음송은 단종의 유배생활을 지켜본 증인이다. 그래서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여 볼 관(觀), 소리 음(音) 자를 써서 관음송이라 이름 붙였다.
뒷산 계단을 따라 오르면 단종이 정순왕후를 그리며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망향탑이 층암절벽 위에 애처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의 한을 달래기 위해 자주 오르던 노산대도 볼 수 있다. 계단을 내려오면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시던 곳이니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쓰인 청령포금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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