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이 짧지만 찬란하게 사랑했던 주인공은 경빈김씨이다.
경빈 김씨는 광산 김씨이며, 아버지는 김재청(金在淸), 어머니는 평산 신씨, 외할아버지는 신명하(申命河)이다.
헌종의 첫 왕비인 효현왕후가 죽자, 새로운 왕비를 뽑기 위한 간택 절차가 시작되었다. 이때 김씨도 참여했는데, 헌종은 김씨를 좋아했으나 왕실 어른들은 홍씨가 더 마음에 들었다. 당시 결혼이란 당사자보다 어른들의 뜻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었기에, 결국 홍씨가 계비(효정왕후)로 정해졌다. 대신 김씨는 헌종의 후궁이 되어 입궁했고, 경빈으로 책봉되었다.
이때 김씨는 수빈 박씨의 예를 그대로 이어받아 무품입궐빈이었다고 한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총애했고, 그녀를 위해 창덕궁에 낙선재(樂善齋)와 석복헌(錫福軒)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정조와 수빈 박씨의 처소를 서로 곁에 두어 순조를 둔 것을 따라한 것으로 경빈 김씨가 후사를 낳기를 바란 것이다. 정작 자식을 가지기 전에 헌종이 1849년 먼저 승하해 그런 일은 없었다.
경빈 김씨는 시할머니 순원왕후와 시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를 잘 모시고, 헌종의 본처인 효정왕후에게도 예를 갖추며 조용히 살다가 1907년(광무 11년)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고종황제는 그녀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조문(弔文)을 직접 지었다. 본인은 조용히 살았지만 사실 그녀의 노년기는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개혁, 을미사변, 아관파천, 심지어 대한제국 선포와 을사조약까지 근대 조선의 굵직굵직한 사건과 망국의 서막이 함께 열리고 있었다. 사망 한 달 후에는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경빈 김씨는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에 안장되어 있다.
“첫 눈에 반한다(一見鐘情)는 말 따위는 믿지 않았소. 당신을 만나기 전에는/ 오래 기다리게 함을 서운해 마시고 이젠 나의 곁에 머물러주기를/ 당신의 온기와 당신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복을 드리니 /멈추어라! 아름다운 모습이여!”(헌종이 경빈에게) [출처: 석복헌기(錫福軒記)]
“善, 당신은 나에겐 그런 존재였습니다. 만월문 사이로 비치는 뒷모습만으로도 60년의 기다림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그림과 글 속에 갇힌 버거움과 외로움은 이젠 화계(花階)에 내려놓으시고 아련한 600일의 기억만을 간직하소서” (경빈김씨가 헌종에게) [출처: 낙선재기(樂善齋記)]
* 헌종과 경빈박씨의 혼례의 기록 < 정미가례시일기 >
* 헌종의 사랑이야기 < 야사 >
헌종은 왕비인 효현왕후(1828~1843)이 승하한 뒤 효정왕후(1831~1904)를 계비로 맞이했다(1844년). 그러나 3년간 후사가 없자 새로이 16살의 후궁(경빈 김씨)을 새로 들였고(1847년 6월) 이듬해 특별히 경빈을 위한 거처(석복헌)을 만들어준 것이다. ‘경빈 김씨가 왕비 간택 때 3차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탈락한 여성이었다’는 야사가 있다. 이때 헌종이 부인으로 낙점된 효정왕후보다 김씨를 마음에 두고 있다가 3년 뒤(1847년) 후궁으로 뽑았고, 효정왕후를 소박놓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러나 효정왕후 간택 때(1844년) 간택단자에는 (경빈) 김씨의 이름이 없다. 야사가 사실이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헌종이 후궁으로 뽑은 이는 경빈 김씨 한사람 뿐이고 그 경빈을 위해 화려한 거처까지 마련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경빈 김씨가 헌종의 사랑을 받은 유일한 여성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헌종과 경빈 김씨의 사랑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헌종이 23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경빈 김씨와의 후사도 없었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은 경빈 김씨는 궁에서 나와 현재의 안국동 근처에서 살다가 1907년 6월 77세의 생을 마쳤다. 경빈 김씨의 분묘는 지금 경기 고양시 서삼릉에 묻혀 있다. 원래는 ‘휘경원 옛자리’에 묻혀있다가 1949년 이장한 것이다.
그런데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가 지난해 서삼릉내 조선왕실의 집단태실과 무덤현황을 파악한 결과 경기 남양주 휘경원 근처로 추정됐던 경빈 김씨 무덤의 원래 자리가 실은 경기 고양군 숭인면 휘경리(현재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인 것으로 밝혀냈다. 경빈 김씨 무덤의 원 위치를 71년 동안이나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 헷갈렸을까. 이유가 있었다. 원래 휘경리(동대문구 휘경동)에는 본래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1770~1822)의 무덤이 있었다. 그러다 이 무덤은 1855년(철종 6년)과 1863년(철종 14년) 두 번이나 이장하는 곡절을 겪는다. 1855년에는 인빈 김씨(1555~1613·인조의 할머니)의 무덤인 순강원(남양주 진접면) 근처로 갔다가 풍수상 ‘불길하다’는 이유로 1863년 다시 지금의 남양주 휘경원으로 재이장한다. 물론 두 번이나 이장했음에도 분묘 이름은 수빈 박씨의 휘호(휘경)를 따라 변함없이 ‘휘경원’이 됐다.
그런데 1907년 승하하여 고양 휘경리(동대문구 휘경동)에 묻히게 된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무덤을 1949년 현재의 서삼릉 묘역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한다. 무덤을 옮긴 뒤 세운 경빈 김씨의 묘비에 ‘휘경원 구국(舊局·옛자리)에서 옮겨왔다’고 기록해놓은게 착각을 유발한 것이다. 이후 비석을 읽은 이들이 ‘휘경원 옛자리’를 ‘남양주 휘경원’으로 철석같이 믿고 각종 공문서에 그렇게 표기했다.
이홍주 궁능유적본부 학에연구사는 11일 “애초에 수빈 박씨의 무덤(휘경원)이 두번이나 이장한데다 동대문구 휘경동이 한때 ‘고양시 휘경리’에 속해 있었던 사실을 몰랐기에 헷갈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6110900011&code=960100#csidx610a2d8eea6c9668980c59be9937b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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