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에 자리한 낙선재는 창덕궁 인정전의 동남쪽, 창경궁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자리 잡은 건물로, 1847년(헌종 13) 건립되었다. ‘낙선(樂善; 선을 즐김)’이라는 명칭은 ‘인의충신(仁義忠信)으로 선을 즐기고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천작(天爵; 하늘이 내린 벼슬)이다’라는 《맹자》의 구절로부터 비롯되었다.
낙선재 오른쪽으로 1848년 헌종의 후궁인 경빈김씨의 처소로 건립된 석복헌과 1848년 중수된 수강재가 옆으로 길게 이어지며 건물군을 형성하고 있어 이 일곽을 통틀어 낙선재라 부르기도 한다. 각 건물 사이에 행랑과 담을 설치하여 공간을 독립적으로 구성하였다. 세 건물 뒤쪽으로 화초·석물·꽃담·굴뚝 등으로 꾸민 아름다운 후원이 있고, 꽃담 너머로는 상량정·한정당·취운정 등의 정자가 있다.
낙선재는 왕이 책을 읽고 쉬는 공간, 즉 서재 겸 사랑채로 조성되었다. 국상을 당한 왕후들이 소복을 입고 은거하는 공간이었다고도 전해진다. 1884년 갑신정변 직후 고종의 집무소로 사용되었고,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이후 순종이 머문 곳이기도 하다. 1963~1970년 영친왕 이은, 1966~1989년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가 기거한 곳으로,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한편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는 1926년 순종이 영면한 후 석복헌에서 생활하였고 1966년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는 1968~1989년 수강재에서 기거하다 죽음을 맞았다.
정면 6칸·측면 2칸에 누마루(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가 딸려 있는 ‘ㄱ’자 형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석복헌·수강재와 달리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맨 왼쪽 편으로 누마루를 앞으로 돌출시켰고, 누마루 뒤쪽으로 온돌방 1칸을 두었다. 누마루 뒤쪽에서 오른쪽으로 온돌방 1칸→대청 2칸→온돌방 2칸→다락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다락방 뒤쪽으로도 온돌방을 돌출되게 두었다. 가운데 대청과 온돌방 앞으로 툇마루를 깔았고, 건물 뒤로는 쪽마루를 길게 깔았다.
여느 궁궐 내 침전 건물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고 사대부 가옥 형식으로 건축하였다. 하지만 여러 자재들을 고도의 기술로 다듬어 섬세하고 아름답게 장식하고, 수준 높고 다양한 창호를 설치함으로써 궁궐의 권위와 위엄을 잘 보여준다. 백미는 누마루와 그 뒤쪽 온돌방 사이에 설치된 만월문이다.
조선 왕가의 여인들이 기거하다 생을 마친 곳으로 국권을 빼앗긴 황실의 마지막 역사를 담고 있고, 조선 후기 장인들의 축적된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건축적 가치가 크다. 2012년 3월 2일 보물 제1764호로 지정되었다.
* 경빈 김씨의 처소 < 석복헌 >
창덕궁의 낙선재·수강재와 연이어져 있는 공간으로, 낙선재 동쪽에 있다. 1993년 복원공사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헌종 14년(1848)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복헌은 후손을 보기 위해 맞아들인 후궁 경빈 김씨(慶嬪金氏)를 위해 헌종이 마련해준 처소였다. 유난히 경빈 김씨를 아꼈던 헌종은 석복헌을 짓기 한 해 전에 자신의 개인 휴식공간인 낙선재를 먼저 지었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 숨을 거둘 때까지 거처했던 곳이기도 하다. 낙선재 일대의 복원 작업을 마친 후 2006년부터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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