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오박해는 1846년(헌종 12) 김대건(金大建)의 체포를 계기로 일어난 천주교 박해의 옥사이다.
당시 우리 나라에 입국해 있던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인 주교 페레올(Ferreol,J.J.)은 김대건과 함께 포교에 힘쓰는 한편, 우리 나라에 입국할 기회만을 노리며 만주에 머물러 있던 신부 메스트르(Maistre)와 최양업(崔良業)을 맞아들일 방도를 강구하게 된다.
페레올은 종래의 잠입로였던 육로는 당국의 감시가 더욱 심해져 입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서해의 안전한 바닷길을 찾기 위해서 김대건을 황해도 서해안으로 보냈다.
김대건은 1846년 5월 13일서울을 떠나 황해도 연안의 백령도해역으로 나가 청나라 배에 지도와 서신을 탁송하고, 귀로에 순위도에 들렀다가 우연한 일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김대건은 등산진·옹진을 거쳐 해주감영으로 끌려가 신문을 받았는데, 그의 신분이 밝혀지자 해주감사는 일의 중대성에 놀라 곧 그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국사범으로 다루어져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천주교가 사학(邪學)이 아님을 주장하고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의 중지를 요구하는 한편, 세계의 정세를 알려 정부당국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러는 동안 김대건과 함께 서해로 나갔던 선주 임성룡(林成龍), 뱃사공 엄수(嚴秀) 등 관련 교인 10여 명이 체포되었다.
계속해서 선주의 아버지 임치백(林致白), 그와 함께 활동한 바 있는 현석문(玄錫文)·한이형(韓履亨) 등이 체포되었다. 때마침 그 해 9월 프랑스의 동양함대 사령관 세실(Cecil)이 군함 3척을 이끌고 홍주해역에 나타나, 1839년(헌종 5) 기해사옥 때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학살한 책임을 묻고 통교를 강력히 요구하게 되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긴장한 정부는 김대건 등의 처형을 서두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부 김대건은 국가에 대한 반역과 사교의 괴수라는 죄목으로 군문효수(軍門梟首)를 언도받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다. 함께 잡혀 있던 교인들 중 배교한 자들을 제외한 현석문·임치백·한이형·남경문(南景文)·우술림(禹述林)·김임이(金任伊)·정철염(鄭鐵艶) 등 8인의 남녀교인들은 9월 20일 사형에 처해졌다.
이들 9인의 순교자들은 1925년 로마 교황에 의하여 복자(福者)로 시복되었고, 다시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시성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 신부 김대건 > 그날의 기록
헌종실록 13권, 헌종 12년 5월 20일 갑술 1번째기사 1846년 청 도광(道光) 26년
김정집이 이양인 김대건을 가둔 일을 핵사하게 하다
황해 감사 김정집(金鼎集)이 이양인(異樣人) 김대건(金大建)을 잡아 가둔 일을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엄히 핵사(覈査)하게 하였다.
헌종실록 13권, 헌종 12년 7월 15일 무술 1번째기사 1846년 청 도광(道光) 26년
약원의 입진을 행하고, 불랑국의 글과 김대건 문제를 의논하다
임금이 중희당(重熙堂)에 나아가 약원(藥院)의 입진(入診)을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불랑국(佛朗國)의 글을 보았는가?"
하자,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말하기를,
"과연 보았는데, 그 서사(書辭)에는 자못 공동(恐動)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또한 외양(外洋)에 출몰하며 그 사술(邪術)을 빌어 인심을 선동하며 어지럽히는데, 이것은 이른바 영길리(英咭唎)와 함께 모두 서양의 무리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대건(金大建)의 일은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
하자, 권돈인이 말하기를,
"김대건의 일은 한 시각이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교(邪敎)에 의탁하여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으니, 그 한 짓을 밝혀 보면 오로지 의혹하여 현혹시키고 선동하여 어지럽히려는 계책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술뿐만 아니라 그는 본래 조선인으로서 본국을 배반하여 다른 나라 지경을 범하였고, 스스로 사학(邪學)을 칭하였으며, 그가 말한 것은 마치 공동(恐動)하는 것이 있는 듯하니, 생각하면 모르는 사이에 뼈가 오싹하고 쓸개가 흔들립니다. 이를 안법(按法)하여 주벌(誅罰)하지 않으면 구실을 찾는 단서가 되기에 알맞고, 또 약함을 보이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처분해야 마땅하다. 이재용(李在容)의 일로 말하더라도 추후에 들으니, 이재용은 실제로 그런 사람이 없고 바로 현석문(玄錫文)이 이름을 바꾼 것이라 하는데, 이제 현석문이 이미 잡혔으니, 이른바 이재용을 어느 곳에서 다시 잡겠는가?"
하자, 권돈인이 말하기를,
"이른바 이재용이 성명을 바꾸고 성안에 출몰한다 하는데, 추포(追捕)하는 일은 진위(眞僞)가 가려지지 않았으니, 포청(捕廳)의 일이 또한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분이 있어야 마땅하다."
하였다. 임금이 또 하교하기를,
"내년 봄에 반드시 소요가 있을 것이다."
하자, 권돈인이 말하기를,
"내년 봄을 기다리지 않고 지금도 소요가 있습니다. 항간에 사설(邪說)이 자못 많은데, 이것은 오로지 그 글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의혹하여 현혹됨이 있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빨리 그 글을 내려서 사람마다 보게 하소서. 그런 뒤에야 절로 의혹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 생각으로는 주문(奏聞)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임진년(壬辰年)045) 에 영길리의 일 때문에 주문한 일이 있는데, 이것과 다를 것이 없을 듯하다."
하니, 권돈인이 말하기를,
"이것은 임진년과 차이가 있습니다. 영길리의 배가 홍주(洪州)에 와서 정박하였을 때에는 10여 일이나 머물렀고, 그들이 교역(交易) 따위의 말을 하였으나 사리에 의거하여 물리쳤으며, 또 곧 정상을 묻고 그 동정을 상세히 탐지하였으므로, 주문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번에 불랑선(佛朗船)이 외양(外洋)에 출몰하였을 때에는 섬 백성을 위협하여 사사롭게 문답하고, 그 궤서(櫃書)를 반드시 바치게 하려고 말끝마다 반드시 황제를 칭탁한 것은 이를 빙자하여 공갈할 계책을 삼은 데 지나지 않을 따름인데, 어찌 이처럼 허황된 말을 문득 주문할 수 있겠습니까? 연전에 양인(洋人)을 죽였을 때에 이미 주문하지 않았는데, 이제 갑자기 이 일을 주문하면 도리어 의심받을 염려가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혹 이런 의논이 있으나, 신의 생각에 주문하는 일은 실로 온당하지 못할 것으로 여깁니다. 다만 의논들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의심받을 염려가 없지 않다. 이는 반드시 조선 사람으로서 맥락이 서로 통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어떻게 살해된 연유를 알겠으며, 또 어떻게 그 연조(年條)를 알겠는가?"
하자, 권돈인이 말하기를,
"한 번 사술(邪術)이 유행하고부터 점점 물들어 가는 사람이 많고, 이번에 불랑선(佛朗船)이 온 것도 반드시 부추기고 유인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으니, 모두 내부의 변입니다."
하였다.
헌종실록 13권, 헌종 12년 7월 25일 무신 1번째기사 1846년 청 도광(道光) 26년
김대건을 효수하라고 명하다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사학 죄인(邪學罪人) 김대건(金大建)을 효수(梟首)하라고 명하였다. 김대건은 용인(龍仁) 사람으로서 나이 15세에 달아나 광동(廣東)에 들어가서 양교(洋敎)를 배우고, 계묘년046) 에 현석문(玄錫文) 등과 결탁하여 몰래 돌아와 도하(都下)에서 교주(敎主)가 되었다. 이 해 봄에 해서(海西)에 가서 고기잡이하는 당선(唐船)을 만나 광동에 있는 양한(洋漢)에게 글을 부치려 하다가 그 지방 사람에게 잡혔는데, 처음에는 중국 사람이라 하였으나 마침내 그 본말(本末)을 사실대로 고하였다. 포청(捕廳)에서 한 달에 걸쳐 힐문하였는데, 그 말하는 것이 교활하여 양박(洋舶)의 강한 것을 믿고 협박하여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서 마침내 그 교(敎)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은전(銀錢)을 흩어서 경외(京外)에서 흔하게 쓰는 재화는 다 양한이 책중(柵中)에서 실어 보낸 것이다.’ 하였다. 또 스스로 말하기를, ‘양외(洋外)의 제번(諸蕃)의 말에 능통하므로, 신부(神父)로서 각국을 위하여 통사(通事)한다.’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현석문과 아울러 같이 주벌(誅罰)하였는데, 현석문은 신유년047) 의 사도(邪徒)로 처형된 현계흠(玄啓欽)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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