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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야기

조선 25대 왕 철종 < 이변 >

by 무님 2020.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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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은 조선후기 제25대(재위:1849~1863) 왕이다.

재위 1849∼1863. 본관은 전주()이다. 이름은 이변()이다. 초명은 이원범()이다.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이다.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이다. 전계대원군 광(君)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 염씨()이다.

전계대원군 이광의 3남으로 1831년(순조 31년) 조선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몇 안 남은 서출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는 적자인 정조 말고도 서자가 몇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은언군으로 이원범의 할아버지이다. 은언군은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서6남이 이원범의 아버지 이광이다. 1786년(정조 10년) 이원범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홍국영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철종의 친부인 이광을 비롯해 식구들이 교동도 유배를 갔다. 거기서 은언군은 순조 때 사사당하지만 이광은 살아남아 교동도에서 무려 40년 넘게 살다가 1830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831년 3남 이원범이 태어난다.
결국 철종은 조선 숙종부터 시작해서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 역시 첩(영빈 이씨)의 아들인 사도세자, 첩의 아들인 은언군, 그 서자인 전계대원군의 서자인 것이다.

 

 

 

 

이원범은 어린 시절에는 그의 형들과 함께 조선 왕가의 몇 안되는 남자 왕족(알량한 방계 종친 신분)으로 그럭저럭 살았다. 두 형들과 달리 아버지 이광이 귀양에서 풀린 뒤 한성부 향교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10살 때 돌아가신 일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 때인 1844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형 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계획하면서 다시 기구한 운명이 된다. 이명은 처형되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형 이경응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못가 강화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작은형과 함께 19살 때까지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이원범은 강화도에서 왕족이 아닌 평범한 백성으로 생을 마칠 뻔하였다.

순조의 손자이자 24대 왕인 조선 헌종이 23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작스레 사망하였고,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순원왕후 김씨는 헌종의 7촌 재당숙이자 순조의 5촌 조카인 이원범을 왕대비의 자격으로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강화도 행렬도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 , 의 딸)의 명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서,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 )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덕완군()에 봉해졌다. 이어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이 되어 왕비의 아버지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하였다. 이듬 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진대()하게 하였다. 또 그 해 여름에 한재가 심한데도 재곡이 없어 구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의 절약과 탐묵(: 욕심이 많고 비리를 저지름)의 징벌을 엄명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여주의 민가 약 1,000호에 은자()와 단목()을 내려 주어 구활하게 하였다. 또한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냥을 지급하였다. 이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초()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는 등 빈민구호책을 적극 실시하였다.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이 좌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정(: ··)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농민들은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해,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을 세워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료에게는 그 방책을 강구해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힘썼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에 얽매여 제대로 정치를 펴 나갈 수 없었다.

이런 사회현상에서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해 사상운동을 전개, 확산시키자 이를 탄압하였다. 교주 최제우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를 씌워 처형하였다.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수용(: 임금의 ) 4본이 천한전(殿)에 봉안되었다.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있어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했을 뿐 후사가 없었다.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이다. 묘호는 철종()이다. 능호는 예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에 있다.

 

 

 

* 조선왕조실록 그날의 기록

철종의 즉위

 

 

 

철정의 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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