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정치란 ‘정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사림(士林)의 통치이념에서 나온 이상적인 정치 도의를 의미하였으나, 척신(戚臣) 또는 총신(寵臣)이 강력한 권세를 잡고 전권(專權)을 휘두르는 부정적 정치형태인 홍국영(洪國榮) 이후의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지칭하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려나갈 수 있는 교화원리로서의 세도는 조광조(趙光祖) 이래 정권을 담당한 사림이 실천해야 할 책무로서 자임한 정치형태였고, 이와 같은 정치자세의 정당성은 사림정치의 권위를 원칙적으로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정조 초의 총신 홍국영이 정권을 담당한 이후 ‘世道政治’는 ‘勢道政治’로 타락, 변질되어 권세정치의 형태로 나타났다. 홍국영은 척신으로서 사도세자(이후 장헌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 정후겸(鄭厚謙) 등의 위협에서 그를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도승지 겸 금위대장에 임명되어 정사가 그에 의해 상주(上奏)되고 그를 통하여 하달되는 막강한 권한이 위임되었다. 그는 정치기반을 굳히기 위해 누이를 정조의 원빈(元嬪)으로 봉하게 하였으며, 궁중의 숙위소(宿衛所)에 머물면서 인사(人事)를 비롯한 모든 정사를 독단하여 세도정치를 폈으나 4년 만에 추방되었다. 그는 국왕의 일개 비서실장·호위대장 격이었으나 그 실권이 재상이나 다름없다 하여 세도재상(勢道宰相)이라 불렸다.
조선시대에 왕의 신임과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던 정치 형태를 말한다. 원래 세도정치란 조광조(1482~1519)가 도학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키면서 주창한 것으로 사림파가 표방했던 통치 원리였지만, 이것이 변질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사람 정치가 지향했던 본래의 ‘세도(世道)’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혈연 패거리 독재정치’가 발호했던 바, 표기도 ‘세도(勢道)’로 바뀌었다.
세도정치는 특정 가문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안동 김씨였다. 왕이 순조 11살, 헌종 8살, 철종 18살, 고종 12살 등과 같이 어린 나이에 등극한 것도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1804~1862년) 때문이었다는 설명이 유력하다. 어린 임금을 앉혀놓고 실권은 세도가문이 장악하겠다는 음모의 산물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수창은 앞 시기의 숙종도 14세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세도정치가 실시되지는 않았다며, 순조 이후 “국왕 외척의 전권은 어느 날 돌출된 것이 아니라, 붕당(朋黨) 간의 대립이 그 극한까지 나아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상황에서 권위에 위협을 느낀 국왕으로부터 선택과 후원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순조 재위의 후반기에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대신해서 풍양 조씨의 세도가 한때 행해졌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는 대원군의 등장까지 그대로 지속되었으며, 특히 헌종의 재위기간 15년(1834~1849년)은 안동 김씨의 독점적 세도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삼정(三政)은 극도로 문란했고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는 등 조선왕조의 말기적 증세가 나타났다. 대원군은 1865년 봄 안동 김씨가 쥐고 있던 비변사 개혁을 통해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왕권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지만, 이후 여흥 민씨의 소수 문벌이 지배하는 세도정치가 계속됐다.
강상규는 고종의 친정(親政) 선포 이후 격렬하게 진행된 대원군과 민씨 척족세력과의 세력다툼의 원인은 어느 면에서 대원군이 조장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것은 여흥 민씨세력의 성립 기반이 대원군 자신의 처신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지적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근거로는 우선 대원군 가계를 들어야 할 것이다. 대원군의 선친 남연군과 자신이 모두 여흥 민씨와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가문인 민치록의 딸, 명성황후를 간택하였다는 것은 스스로가 세도정치를 혁파하려 했으면서도 자신의 경우에 대해서는 객관적이지 못한 권력가로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명성황후가 집권하기 이전에 이미 여러 민씨 일족이 정계에 진출한 것 등도 이러한 논거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대원군의 왕권위상 강화 노력은 명성황후 세력과의 경쟁으로 왜곡되어졌고 이는 외세개입과 맞물려 결과적으로 왕권위상을 실추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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